“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린다는 것은 과학적 진실입니다. 실망스럽고 아쉬운 판결이지만 언젠가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호흡기내과 전문의)은 15일 건보공단이 담배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533억원 손해 배상 소송 2심에서 패소하자 이렇게 말했다. 국민들이 담배를 피워 폐암과 후두암에 걸려 진료비를 지출했으니 담배 회사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담배는 한 개비만 피워도 니코틴이 혈관으로 들어가 뇌에서 신경 신호를 전달하는 도파민 수치를 높인다. 이에 따라 흡연자들은 계속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정 이사장은 “담배에 중독성이 있는 것은 (의학) 교과서에 다 나오는 이야기”라면서 “중독성을 병원에서 진단받은 분들이 계신다”고 했다.
정 이사장은 “담배를 피우면 100%는 아니지만 폐암에 걸릴 수 있고 고혈압과 당뇨 등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킨다”면서 “과학과 법의 괴리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차가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들이 다치고 사망했는데 운전자가 도망간 것”이라면서 “담배 회사는 뺑소니범”이라고 했다.
◇2심, 흡연과 폐암 개연성 인정 어려워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6-1부(재판장 박해빈)는 이날 건보공단이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고의 보험 급여 지출은 보험법에 따른 의무 이행”이라면서 “피고의 위법 행위가 아닌 보험 계약에 따른 지급”이라고 했다. 건보공단이 보험법에 따라 환자들의 급여를 지출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소송의 쟁점은 유해성과 중독성이었다. 건보공단은 흡연이 폐암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했지만 2심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흡연과 폐암의 개연성(蓋然性)을 인정하려면 개인이 흡연한 시기와 흡연 기간, 폐암 발생 시기, 건강 상태, 생활 습관, 질병 상태 변화, 가족력 등을 살펴야 한다고 봤다. 흡연 이외에 다른 이유로 암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담배 회사들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건보공단은 담배 회사들이 중독을 유도했다며 니코틴 함량을 줄인 담배를 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자들이 흡연을 시작한 1960~1970년대는 담뱃갑 경고 문구가 지금보다 미미했고 위험성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는 입장이었다. 재판부는 “흡연자에 따라 니코틴 흡인량이 달라질 수 있어 의존성이 생기지 않는 함량 설정이 어렵다”면서 “오래 전부터 담배 유해성과 중독성을 경고했다”고 했다.
◇12년 담배 소송…“흡연으로 국민 건강 나빠져”
건보공단은 지난 2014년 4월 담배 회사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 등을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폐암과 후두암에 걸린 환자 3465명을 치료하느라 건보공단이 2002~2012년 진료비로 쓴 금액을 반환하라는 것이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22부(재판장 홍기찬)는 2020년 11월 담배 회사 손을 들어줬다. 건보공단이 항소해 사건은 2심으로 넘어갔다. 건보공단은 30년 이상 담배를 피우거나 하루 한 갑씩 20년 이상 담배를 피운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소세포 폐암 발생 위험이 54배 높다는 등의 연구 결과를 재판부에 제출했으나 이날 패소했다.
국내 대법원 판례는 담배를 피우다 질병에 걸리면 흡연자 책임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미국은 1998년 미시시피를 포함한 50개 주(洲) 정부가 담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합의금 2460억달러(362조원)를 받았다. 흡연자 질병을 치료하느라 주 정부가 지출한 진료비를 지급하라며 필립모리스와 R.J레이놀즈 같은 담배 회사에 책임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