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5일(현지 시각), 싱가포르 서부 메드테크 허브(MedTech Hub)에 자리한 퍼킨엘머(PerkinElmer) 제조 시설을 찾았다. 200명이 넘는 기술자들이 조립 라인과 테스트 벤치를 오가며 장비 부품 하나하나를 손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테스트 벤치 위에서는 장비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며 최종 품질 점검이 이어졌다.
제약·수질·대기·반도체 테스트 장비부터 방사선 감지 장비까지, 회사의 모든 제품은 단일 흐름 공정(Single Flow Process)을 거친다. 기술자들은 매일 아침 전날 한 작업을 되짚어보고, 안전·품질·조립·최종 점검까지 꼼꼼히 챙긴다.
싱가포르 지역 제조·운영 책임자 데스몬드 청(Desmond Chng)은 “현재 모든 실험실 장비를 생산하는 유일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며 “미국 공장은 이미 문을 닫았고, 소형·저가 제품 일부를 제외하면 전 과정을 싱가포르에서 관리한다. 말레이시아 조호르(Johor)에서 생산되는 제품도 이곳의 기술·운영 지원 없이는 안정적인 품질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37년 정밀 광학 기기 제조업체로 출발한 퍼킨엘머는 2022년 글로벌 구조조정 이후 싱가포르에서 고정밀 분석 장비 기업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97년 현지 사무소와 기술 지원 조직을 갖춘 뒤, 동남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싱가포르를 핵심 거점으로 확장했다. 2019년 5월에는 메드테크 허브에 현재의 제조 시설을 신설하며, 싱가포르를 글로벌 분석 장비 생산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퍼킨엘머의 싱가포르 제조 시설은 병원용 대마 검사 장비와 방위 기관용 민감 방사선 모니터링 장비를 포함한 7종의 핵심 장비를 생산한다. 완성된 장비는 대부분 창이공항을 통해 전 세계 실험실로 배송된다.
위기는 있었다. 청 책임자는 사업부 분리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에는 이곳을 닫을 수도 있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경영진은 규제 환경 등을 고려해 싱가포르 시설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엄격한 규제·강력한 IP…퍼킨엘머가 싱가포르에 주목한 이유
싱가포르는 국가 규제 기관인 보건과학청(HSA)이 싱가포르에서 생산된 장비가 미국 FDA, 유럽 CE 등 국제 기준을 충족하도록 관리한다. 여기에 국립 과학기술연구청(A*STAR) 산하 ‘MedTech Catapult’은 기술 개발, 생산, 규제 대응을 한 번에 지원한다.
퍼킨엘머 관계자는 “싱가포르의 엄격한 규제 체계는 전 세계적으로 신뢰 받는다”며 “식품 안전과 환경 부문의 경우, 신흥 오염물질에 대한 싱가포르의 선제적 대응 덕분에 여러 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시험 방법을 현지에서 개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력한 지식재산권(IP) 보호도 장점이다. 세계경제포럼(WEF)과 미국 재산권연대(PRA)는 각각 2019년과 2024년 싱가포르를 글로벌 IP 보호 선도국 2위로 평가했다. 청 책임자는 “중국 업체들이 장비에 들어가는 램프 하나를 모방하는 데에도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라고 했다.
뿐만 아니다. 싱가포르는 퍼킨엘머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 거점 역할을 한다. 퍼킨엘머 관계자는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물류 허브로, 한국의 반도체 공장에서 유럽의 식품 검사 연구소까지 복잡한 장비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배송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메드테크 허브를 통하면 아시아 지역의 전문 부품업체들로부터 고품질 기계·전자 부품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다”며 “이러한 현지화 전략은 글로벌 운영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했다. 또, “다른 메드테크 선도 기업들과 함께 위치해 있어, 바이오·제약과 식품 고객이 요구하는 엄격한 품질 기준(GMP)을 이해하는 엔지니어를 확보하는 데에도 용이하다”고 덧붙였다.
◇진화하는 퍼킨엘머…싱가포르 시설, ‘제조·혁신의 등대’로
이러한 생태계 속에서 퍼킨엘머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서비스를 연결한 ‘통합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현장에서 고객과 함께 실제 샘플을 테스트하는 ‘데모 랩(Demo Lab)’은 지역을 지원하는 전략적 핵심 가치 창출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최근 재활용 플라스틱이나 과불화화합물(PFAS)이 포함된 시료, 차세대 배터리 소재 등 복잡한 샘플을 들고 와 성능을 평가하는 고객이 늘었다”며 “고객들은 이 과정을 ‘시험 방법을 함께 검증하고, 워크플로우를 최적화하며, 실제 투자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퍼킨엘머는 싱가포르 시설을 글로벌 첨단 제조와 혁신의 ‘등대(Lighthouse)’로 만든다는 목표다. 회사 관계자는 “이를 위해 현지 부품 조달을 확대해 더욱 탄탄한 공급망을 구축하고, APAC 지역 고객들이 최신 시험 방법을 배우기 위해 찾는 지역 교육 허브로서의 역할을 강화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