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바이오 전략은 ‘연구에서 출발해 제조로 가는’ 통상적 경로와 다르다. 대규모 생산이 가능한 제조 기반을 먼저 구축한 뒤, 그 과정에서 축적된 공정 경험과 인력을 토대로 연구와 혁신 역량을 끌어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구상의 실행 주체는 싱가포르 국영 산업단지 개발기관인 JTC다. JTC는 바이오 산업을 연구개발(R&D), 시제품·초기 제조, 대규모 생산의 세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에 맞는 시설을 각기 다른 지역에 배치해 왔다. 도심에는 연구 거점을, 서부 산업 지역에는 제조 인프라를 뒀다.

지난 5일(현지 시각) 조선비즈와 만난 시잉 첸(Siying Chen) JTC 바이오메디컬 부문 부국장은 “싱가포르는 국가 건설 초기부터 제조업을 핵심 축으로 삼아 왔고, 지금도 제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20%를 차지하는 경제의 근간”이라며 “일자리와 기술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먹고사는 기반’이기 때문에 이 축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집중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바이오메디컬, 항공우주, 반도체 등 전략 산업을 중심으로 아시아 관문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활용해 글로벌 기업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지속해 왔다”며 “바이오메디컬 분야는 현재 GDP의 약 3%, 제조업 생산의 약 10%를 차지하는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연구는 도심, 생산은 서부…초기 제조 위한 ‘완충 지대’도

도심 서북부 원노스(One-North)에 조성된 바이오폴리스(Biopolis)는 싱가포르 바이오 산업의 ‘상류’에 해당하는 연구 거점이다. 제조 기반을 먼저 갖춘 뒤 연구 역량을 끌어올리겠다는 국가 전략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공간이기도 하다. 2003년 1단계 조성을 시작으로 여섯 차례 확장을 거쳐 현재 규모는 약 38만2000㎡에 이른다.

단지에는 국립과학기술연구청(A*STAR) 산하 생의학 연구소를 비롯해 글로벌·현지 제약·바이오 기업과 의료기기 기업 등 115개 기업과 기관이 입주해 있다. 국립대(NUS), 국립대병원(NUH)과 인접해 기초 연구와 임상 연구를 연계하기에도 용이하다.

가장 큰 특징은 연구 인프라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구조다. A*STAR 산하 연구지원센터(RSC)를 통해 고가의 분석 장비와 전문 기술을 공유, 초기 기업의 설비 부담과 연구 준비 기간을 줄였다. JTC 관계자는 “덕분에 95%가 넘는 입주율을 기록 중”이라고 했다.

바이오폴리스./싱가포르 국영 산업단지 개발기관(JTC)

연구 성과가 실제 제품으로 이어지는 단계에서 기업의 활동 무대는 서부 투아스(Tuas)로 옮겨간다. 투아스 바이오메디컬 파크(Tuas Biomedical Park)는 1997년 조성된 바이오·뉴트라슈티컬 전문 산업단지로, 약 246만㎡ 규모다.

1990년대 후반 싱가포르는 기초 생명과학 연구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대신 정치적 안정성과 규제 예측 가능성, 항만·물류 인프라, 숙련된 공정 인력이라는 강점을 갖고 있었다. 정부가 ‘신약 개발 국가’를 지향하기 전, 글로벌 제약사의 생산기지를 먼저 유치하는 전략을 펼친 배경이다.

이 단지를 통해 다국적 제약사들은 연구개발은 본국에 두고, 대규모 생산은 싱가포르에서 수행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싱가포르는 기술 이전과 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GMP)에 부합하는 운영 경험, 규제·품질 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제조 기반을 확보했다. 현재 이곳에는 머크(MSD), 화이자, GSK 등 19개 글로벌 제약·바이오 기업이 거점을 두고 백신, 원료의약품(API) 등을 생산 중이다.

단지 조성에는 JTC뿐 아니라 교통청(LTA), 수자원청(PUB), 에너지시장청(EMA) 등 관계 부처가 함께 참여했다. 도로, 전력, 용수 등 핵심 인프라를 사전에 구축해 기업이 입주 후 곧바로 생산을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투아스 바이오메디컬 파크./싱가포르 국영 산업단지 개발기관(JTC)

연구와 대규모 제조 사이를 잇는 중간 단계 공간도 있다. 싱가포르 최초의 의료기기 전용 복합 제조 시설인 메드테크 허브(MedTech Hub)다. 전체 면적은 약 3만8000㎡로, 다양한 규모의 36개 유닛으로 구성돼 있다.

연구 성과를 곧바로 대규모 공장으로 이전하기 어려운 의료기기 산업의 특성을 고려해, 초기 제조를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했다. 기본 골조와 설비만 갖춘 상태에서 입주 기업이 목적에 맞게 내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JTC 관계자는 “바이오폴리스에는 일라이 릴리, P&G, A*STAR 산하 진단개발 허브(DxD)와 함께 보건과학청(HSA), 국가환경청(NEA) 등 규제 기관이 입주해 있다”며 “투아스 메디컬 파크와 메드테크 허브가 제조를 담당한다면, 바이오폴리스는 연구와 규제, 기업 본사가 맞물린 생태계의 중심”이라며 고 말했다.

그는 “세계 주요 바이오 기업 80여곳이 싱가포르에 지역 본사를 두고, 다수가 바이오폴리스에서 연구개발을 수행하고 있다”며 “연구와 제조, 규제가 하나의 공간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 싱가포르 바이오 생태계의 특징”이라고 했다.

메드테크 허브./싱가포르 국영 산업단지 개발기관(JTC)

◇연구·제조 분리 그 이상…국가가 설계한 ‘성장 경로’

싱가포르 바이오 인프라 전략은 단순히 연구와 제조를 공간적으로 나누는 데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산업의 성장 단계를 국가가 정의하고, 그 단계에 맞는 공간을 선제적으로 설계해 기업의 ‘다음 이동’이 국경 밖이 되지 않도록 막는다.

이는 싱가포르의 중장기 국가 산업 계획과 맞물려 있다. 정부는 ‘제조 2030’ 비전을 통해 바이오메디컬을 첨단 제조의 핵심 축으로 설정하고, 2020년 대비 2030년까지 제조업 부가가치를 50% 늘리는 목표를 세웠다.

동시에 ‘연구·혁신·기업(RIE) 2030’ 계획을 통해 내년부터 2030년까지 약 370억싱가포르달러(약 37조원)를 투입, 바이오메디컬과 첨단 제조 분야 연구개발을 강화하도록 했다. 이러한 정책 환경 속에서 아스트라제네카와 우시바이오로직스, SCG셀테라피 등 글로벌·현지 기업들은 싱가포르에 생산 시설과 R&D 센터를 잇따라 구축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앞으로도 국가 주도로 인프라를 확장해나갈 계획이다. JTC는 산업 부지 추가 개발을 검토하고 있으며, 연구 수요 변화에 대응해 바이오폴리스 재정비도 준비 중이다.

첸 부국장은 “바이오 산업은 ICT처럼 몇 년 만에 성과가 나오는 분야가 아니다”며 “싱가포르 바이오 산업의 역사는 약 20년에 불과하지만, 연구개발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싱가포르에서 출발한 기업 수가 늘었고, 민관 협력도 눈에 띄게 확대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소비재, 식품·영양, 농생명과 화학 분야까지 연구 영역이 확장되며 바이오 산업을 뒷받침하는 생태계가 자연스럽게 커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