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서부 투아스 메디컬 파크(Tuas Biomedical Park) 내 JTC 메드테크 허브(MedTech Hub) 건물에 입주한 바이오 기업 ‘미렉시스(MiRXES)’의 제조 시설./싱가포르=박수현 기자

지난 5일(현지 시각), 싱가포르 서부 투아스 바이오메디컬 파크(Tuas Biomedical Park) 내 메드테크 허브(MedTech Hub).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을 올라 안쪽으로 들어서자 천장과 바닥, 벽까지 흰색으로 통일된 공간이 나타났다. 기계 소음은 거의 들리지 않았고, 내부 온도는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벽면 절반 이상을 차지한 유리창 너머로는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박스와 키트를 옮기고 있었다. 대규모 설비는 많지 않았지만, 사람과 물품이 이동하는 동선은 촘촘히 짜여져 있었다.

이곳은 싱가포르 바이오테크 기업 ‘미렉시스(MiRXES)’가 암 조기진단 키트를 생산하는 시설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키트는 매년 수백만개에 이르며, 동남아와 중동, 일본, 중국으로 공급된다.

공간은 ‘고혼합·저물량(high-mix, low-volume)’ 원칙에 맞춰 설계됐다. 한 번에 대량으로 만들어 쌓아둘 수 없는 키트 특성 때문이다. 키트에 들어가는 효소와 프라이머, 완충액은 시간이 지나면 성능이 떨어진다.

현장을 안내한 제레마이아 디코스타(Jeremiah DeCosta) 미렉시스 운영담당 부사장은 “곧 냉장 상태에서 최대 1000개 키트를 자동으로 포장하는 설비를 들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냉장 컨베이어 시스템은 시중에 없어 국립과학기술연구청(A*STAR) 산하 첨단재제조기술센터(ARTC)와 2년간 공동 개발했다”며 “전체 비용은 보조금을 포함해 약 180만미국달러(약 26억5500만원) 수준이었는데, 국가연구재단(NRF) 등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덧붙였다.

미렉시스가 냉장 자동 포장 설비를 들이기 위해 비워둔 공간./싱가포르=박수현 기자

◇국가 연구에서 출발한 유니콘, 다음은 ‘다중 암 조기진단’

미렉시스는 동남아에서 탄생한 첫 ‘바이오테크 유니콘’이다. 올해 홍콩증권거래소(HKEX)에 상장하며 기업가치가 10억미국달러(약 1조4750억원)를 넘어섰다. 지난해 매출은 2030만미국달러(약 299억원)로, 아직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성장 속도는 가파르다. 2014년 A*STAR 산하 연구소에서 마이크로RNA(miRNA)를 활용한 암 조기진단 기술을 연구하던 연구자 세 명이 창업했다.

대표 제품은 ‘가스트로클리어(GASTROClear)’다. miRNA를 활용한 액체생검 기반 검사로, 세계 최초로 규제 승인을 받은 위암 조기진단 혈액 검사로 꼽힌다. 싱가포르와 중국 등에서 허가를 받았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는 혁신의료기기(Breakthrough Device) 지정도 받았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엔 ‘포티튜드(Fortitude)’ RT-PCR 키트 시리즈 등을 개발·공급하며 감염병 진단 제품을 상용화했다.

임상 파이프라인도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현재 폐암(LUNGClear)을 비롯해 대장암, 간암, 유방암, 췌장암 등 주요 고형암을 대상으로 한 단일 암 조기진단 키트들이 임상 단계에 있으며, 동일한 miRNA 플랫폼을 활용해 하나의 혈액 검사로 여러 암을 선별하는 ‘다중 암 조기진단’ 제품도 개발 중이다.

조기진단을 넘어 정밀의료 분야로의 확장도 병행하고 있다. 58개 유전자를 분석하는 표적 차세대염기서열분석(NGS) 패널 ‘APEX’를 비롯해, 1000개 이상 유전자를 포괄적으로 분석하는 NGS 검사 ‘COMPASS’도 파이프라인에 포함돼 있다.

미렉시스는 지난 5월 23일 홍콩증권거래소(HKEX)에 상장하며 동남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바이오테크 유니콘’ 반열에 올랐다. 상장 첫 거래일 종가는 시가총액 82억9000만홍콩달러(약 10억6000만미국달러)를 기록했다./미렉시스

◇지원 넘어 ‘운영자’로 나선 정부…인프라 선투자해 기업 불러

미렉시스 사례는 개별 기업의 성과를 넘어, 싱가포르가 바이오 산업을 어떻게 키워왔는지를 보여준다. 싱가포르는 2000년대 초 바이오메디컬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지정한 이후 연구개발에 대한 장기 투자를 이어왔다. 현재 시행 중인 연구·혁신·기업(RIE) 2025 계획(2020~2025)에는 총 280억싱가포르달러(약 3조1920억원)가 배정됐다.

정부의 역할은 연구비 지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A*STAR는 연구 성과가 사업으로 이어지는 단계에서 기술 검증과 초기 사업화를 맡고, 싱가포르 경제개발청(EDB)은 글로벌 제약사와 스타트업 유치를 담당한다. 무역산업부 산하 엔터프라이즈싱가포르(ESG)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설비 도입을 지원한다. 미렉시스가 냉장 자동 포장 설비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기능 분담 구조 속에서 가능했다.

이 같은 정책적 지원은 특히 제조 단계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산업단지인 투아스 바이오메디컬 파크다. 도로와 전력, 수도, 가스, 통신망 등 인프라를 사전에 구축해, 기업들이 긴 준비 기간 없이 곧바로 제조를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약 246만제곱미터 규모의 부지에는 머크, 노바티스, 화이자, 로슈, GSK, 애보트 등 글로벌 제약·의료기기 기업들이 현지 기업들과 함께 입주해 있다.

미렉시스가 입주한 메드테크 허브는 의료기기 제조 기업을 위한 다세대 입주형 시설이다. 건물의 기본 구조와 필수 설비만 제공하고, 내부는 입주 기업이 연구개발이나 제조 목적에 맞게 직접 설계하도록 했다. 높은 층고와 클린룸에 적합한 구조, 물류 하역장과 화물 리프트 등은 초기 기업이 대규모 설비 투자를 하지 않고도 제조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하는 조건을 갖췄다.

제조 단계에서 임대료는 기술 못지않은 변수다. 디코스타 부사장은 “회사 규모가 커졌어도 임대 조건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며 “글로벌로 거점을 확장하더라도 이곳은 유지하겠다고 말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싱가포르의 산업 정책이 창업 단계에 그치지 않고 ‘성장 이후’까지 염두에 두고 기획돼 있다는 뜻이다.

메드테크 허브./싱가포르 국영 산업단지 개발기관(J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