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 바이오 기업의 기술 수출 규모가 올해 20조원을 넘겼다. 역대 최고 성적이다. 기술수출 건수는 17건으로 과거 최대치였던 2021년(34건)보다는 줄었지만, 1조원을 웃도는 대형 계약이 늘면서 전체 규모는 크게 확대됐다. 업계에서는 ‘소수 대형 계약’ 중심으로 기술 수출의 질적 전환이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올해 1월~12월 국내 제약 바이오 기업의 누적 기술 수출이 145억3000만달러(20조8350억원·비공개 계약 제외)으로 집계됐다고 지난 28일 밝혔다. 이로써 종전 최대 실적이었던 2021년 13조3720억원을 넘어섰다.
기술 수출 건수는 지난 2021년 34건에 비해 올해는 17건으로 절반이었지만, 계약 규모는 약 13조8000억원에서 1.5배 성장했다. 1조원이 넘는 계약이 늘어나면서 전반적인 질적 성장을 이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플랫폼 덕에 … 역대 최고 성적 낸 K바이오
국내 제약 바이오 기업들이 올해 역대 최고의 기술 수출 성적을 낸 것엔 외부적인 상황이 작용한 것도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 상당수가 자사의 오리지널 블록버스터 약물 특허 만료 시기를 맞으면서 대체 파이프라인을 찾기 시작했다. 신약은 연구·개발(R&D) 기간이 길고 임상 실패 확률도 높은 만큼, 이미 검증된 플랫폼 기술 확보를 하려는 기업이 늘어난 것이다.
한국의 플랫폼 기술이 주목받는 이유다. 신약 개발 플랫폼을 개발하면, 하나의 기술이나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신약 후보 물질을 효율적으로 찾아낼 수 있다. 기술이 하나 확립되면 다양한 질환과 표적 치료에 응용할 수 있게 된다. 실제 올해 이뤄진 기술 이전 계약의 약 65%가 플랫폼 기술 계약이었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지난달 글로벌 시총 1위 제약사인 일라이 릴리에 ‘그랩바디-B’ 플랫폼 기술을 25억6200만달러(약 3조6700억원)에 이전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랩바디-B는 퇴행성 뇌 질환 치료제 개발의 큰 장애물인 뇌혈관장벽에 약물이 침투하도록 돕는 기술이다. 지난 4월에도 에이비엘바이오는 GSK에 그랩바디-B 기술을 최대 30억2000만달러(약 4조3300억원) 규모로 이전하는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단일 기업이 플랫폼 기술로 8조원 가량의 기술 이전에 성공한 것이다.
알테오젠도 정맥주사(IV)를 피하주사(SC)로 바꾸는 플랫폼 ‘ALT-B4’ 기술을 지난 3월에 아스트라제네카 자회사 메드이뮨에 최대 13억5000만달러(약 2조원)를 받고 이전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메드이뮨이 여러 항암제 SC 제형에 대한 글로벌 개발·상업화 권리를 독점적으로 확보하는 조건이다. 알테오젠은 매출 로열티를 따로 받는다.
지난 5월엔 알지노믹스도 일라이 릴리에 최대 14억원(약 2조원) 규모로 유전자 치료제 기술을 이전하는 계약을 맺었다. 알지노믹스는 RNA의 일부를 편집하는 치료제 기술, 선(線)형인 RNA를 원(圓)형으로 바꿔 RNA를 더욱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기술 등을 보유하고 있다.
◇항체약물접합체(ADC), 알츠하이머 분야도 활발
항체 약물 접합체(ADC) 분야의 기술 거래도 활발하다. ADC는 암세포만 정확히 겨냥해 항암제를 전달하는 ‘유도 미사일형’ 치료제를 일컫는 말이다. 정상 세포 피해는 줄이고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공격하는 항암 기술이다.
에임드바이오는 지난 10월 베링거인겔하임과 ADC 신약 물질 기술 이전 계약을 최대 9억9100만달러(약 1조4200억원) 규모로 체결했다. 베링거인겔하임은 이로써 에임드바이오가 개발한 신규 종양표적 기반 ADC에 대한 개발·상업화 권리를 확보했다.
알츠하이머를 비롯한 퇴행성뇌질환 치료를 위한 기술 거래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16일엔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 개발 기업 아델이 사노피와 알츠하이머병 치료 물질 ‘ADEL-Y01’에 대한 독점적 개발·상업화 권리를 이전하는 계약을 최대 10억4000만달러(약 1조5000억원)에 체결했다. ADEL-Y01은 알츠하이머를 일으키는 타우 단백질 중에서도 몸에 필요한 정상 타우 단백질은 건드리지 않고, 서로 엉겨 붙어 뇌세포를 망가뜨리는 해로운 타우 단백질만 골라 없애는 치료제다.
아리바이오도 지난 6월 아랍에미리트 국부펀드인 ADQ 산하 아르세라와 중동·중남미, 아프리카, 독립국가연합에 대한 독점 판매권 계약을 총 6억달러(약 8600억원)에 성사시켰다. 지난 2월엔 올릭스가 일라이 릴리와 대사 이상 지방간염(MASH) 및 심혈관·대사 질환 치료제 기술을 6억3000만달러(약 9000억원)에 이전하는 계약을 맺었다.
◇블록버스터는 ‘아직’
기술 이전 성과가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 국내 제약 바이오 기업들이 자체 글로벌 블록버스터(연간 매출액 1조원 이상의 바이오 의약품)를 내놓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선 한계를 보인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신약 파이프라인의 초기 연구 단계부터 후기 허가 임상까지 독자적으로 끌고 갈 체력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측은 “국내 제약 바이오 기업들이 앞으로는 실제 임상 검증 능력 등을 갖추고 자체 블록버스터를 내놓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