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글로벌 제약·바이오 인수합병(M&A) 시장은 ‘거래 규모의 대형화’와 ‘전략적 자산 확보’가 두드러진 한 해였다.

관세·금리·약가 정책 등 산업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 프랑스 제약기업 사노피(Sanofi), 미국 제약기업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 미국 화이자(Pfizer) 등 글로벌 기업들이 수조원대 인수에 나서 관심을 모았다.

그래픽=손민균

28일 시장조사업체 글로벌데이터(GlobalData)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제약·바이오 업계의 M&A 누적 거래 금액은 1796억달러(약 259조원) 규모로, 전년(1371억달러)보다 약 31%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15일까지 집계된 수치로, 최종 데이터는 내년 초 발표될 예정이다.

전년과 비교하면 올해 거래 건수는 비슷한 수준인데 총거래 금액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상반기에는 미국의 관세·금리·약가 정책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제약 분야 M&A 시장이 위축된 흐름을 보였다. 하지만 하반기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들이 잇따라 인수 투자를 단행해 글로벌 M&A 시장 거래가 점진적으로 회복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 특허 만료 공백 과제 빅파마, M&A 큰 손

조 단위 인수에 나선 기업들을 보면, 기존 제품의 매출 의존도를 낮추고 블록버스터급 의약품의 특허 만료 이후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프랑스 제약기업 사노피다. 사노피는 올해 하반기에만 3건의 인수 거래를 발표했다. 인수 거래 가치를 합산하면 18조원 규모다.

사노피는 24일(현지 시각) 미국 백신기업 ‘다이나백스테크놀로지스(Dynavax Technologies)’를 약 22억달러(약 3조14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거래로 사노피는 다이나백스가 이미 시판 중인 성인용 B형간염 백신과 함께 임상 1·2상 단계의 대상포진 백신 후보물질을 확보하게 됐다.

사노피가 성인용 백신 포트폴리오를 강화하고, 대상포진 백신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상업화된 대상포진 백신은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재조합 백신인 ‘싱그릭스’ SK바이오사이언스의 ‘스카이조스터’ 2종에 그친다.

프랑스 투르(Tours)에 위치한 사노피(Sanofi) 연구소. /연합뉴스

사노피는 지난 6월과 7월 희귀·면역 질환 치료 후보물질을 보유한 미국 바이오기업 ‘블루프린트메디슨’을 최대 95억달러(약 13조원)에, 영국 백신 개발 기업 ‘바이스바이오’를 15억달러(약 2조원)에 각각 인수한다고 했다.

사노피의 아토피성피부염·천식 치료제 ‘듀피젠트’의 특허가 2031년에 만료될 예정인데, 이에 대비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듀피젠트의 작년 연간 매출액은 130억7200만유로(약 22조원)에 달했다.

미국 제약기업 애브비(Abbvie)는 지난 8월, 정신질환 치료제 개발사 길가메시 파마슈티컬스(Gilgamesh Pharmaceuticals)의 우울증 치료제 후보물질 개발 프로그램을 최대 12억달러(약 1조7200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맺었다.

BMS는 지난 10월 세포치료제 개발 기업 오비탈테라퓨틱스(Orbital Therapeutics)를 현금 15억달러(약 2조1500억원)에 인수했다. 애브비의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휴미라(Humira)의 미국 특허는 2023년에 만료됐고, BMS의 항응고제 엘리퀴스(Eliquis)의 주요 물질 특허는 지난해 만료됐다.

1 노보노디스크의 위고비. 사진 노보노디스크2 일라이릴리의 젭바운드. 사진 일라이릴리3 비만 치료제를 사용해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고 밝힌 유명인들. 왼쪽부터 킴 카다시안, 일론 머스크, 오프라 윈프리. 사진 인스타그램·블룸버그

◇ 비만·대사질환 인수전 활기

올해 비만, 대사질환 치료제 분야 인수 열기가 뜨거웠다. 미국 제약사 화이자(Pfizer)와 덴마크 노보 노디스크(Novo Nordisk)가 먹는 비만약을 개발 중인 미국 바이오 기업 멧세라(Metsera)를 두고 인수 경쟁을 벌이다 화이자가 승리했다. 화이자와 멧세라가 합의한 거래 금액은 100억달러(약 14조3400억원)에 달한다.

화이자는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매출 하락을 겪어왔는데, 멧세라 인수를 통해 비만 치료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노보 노디스크는 지난 10월 아케로테라퓨틱스(Akero Therapeutics)를 최대 52억달러(약 7조46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노보는 아케로가 개발 중인 대사이상 지방간염(MASH) 치료 신약 후보 물질 에프룩시퍼민(efruxifermin)을 확보했다. MASH는 음주와 무관하게 대사 기능 장애로 간에 지방이 쌓이고 염증, 손상이 발생하는 질환이다. 고령화와 비만 증가 추세로 세계적으로 환자가 늘고 있다. 현재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MASH 치료제는 2종에 그쳐 블루오션으로 꼽히는 분야다.

노보의 블록버스터 비만 치료제 위고비의 주성분인 ‘세마글루타이드’의 세계 특허가 내년부터 인도, 중국, 캐나다 등에서 잇달아 만료되는데 이에 대비해 전략 자산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 미국 생산기지 확보 나선 K-바이오

국내 기업들은 미국의 의약품 관세 부과에 대응해 M&A 시장에 매물로 나온 미국 의약품 생산 공장을 사들였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과 미국 메릴랜드주 락빌에 위치한 ‘휴먼지놈사이언스(Human Genome Sciences·HGS)’ 바이오의약품 생산시설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인수 금액은 2억8000만달러(약 4147억원)다. 회사에 따르면, 해당 생산시설은 6만리터 규모의 원료의약품(DS) 공장이다. 2개 제조동으로 구성돼 임상 단계부터 상업 생산까지 다양한 규모의 항체의약품 생산을 지원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췄다.

미국 메릴랜드주 락빌에 위치한 휴먼지놈사이언스 바이오의약품 생산시설 전경. /삼성바이오로직스

그동안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해외 공장 인수나 증설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미국의 의약품 관세 정책과 사실상 중국 바이오 기업을 저지하는 내용의 ‘생물보안법’ 통과 등을 고려해 인수 결정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셀트리온은 지난 9월 일라이 릴리와 약 3억 3000만 달러(4600억원) 규모의 미국 현지 생산시설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셀트리온은 공장 인수·운영에 7000억원, 증설에 7000억원 등 총 1조400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미국 내 생산 거점을 확보해 관세 리스크를 완전 해소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편 일각에선 “각 회사가 인수한 시설이 최신 대규모 생산 설비와 비교하면 경쟁력이 떨어져, 증설이나 설비 현대화를 위한 추가 투자가 불가피하다”는 시각도 있다.

내년에도 글로벌 제약·바이오 M&A 시장 흐름이 올해와 유사하게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삼일회계법인 PwC는 보고서를 통해 “2025년에는 파이프라인 공백을 메우기 위한 특정 자산 중심의 거래가 주를 이뤘다”며 “2026년 M&A도 거래 건수 확대보다는 임상 데이터와 과학적 차별성을 갖춘 혁신 자산 확보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PwC는 “소수 지분 투자나 단계적 옵션 구조 같은 유연한 거래 방식도 확대될 것”이라며 “규제·금리·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완화될 경우, 글로벌 제약사들이 포트폴리오 재편과 성장 전략 실행을 위해 M&A를 다시 적극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