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가 비만을 평생 관리가 필요한 만성질환으로 규정하고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계열 치료제를 장기 치료 전략의 일부로 공식 권고하면서, 글로벌 비만 치료제 시장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단기 체중 감량 경쟁에서 벗어나 치료의 지속 가능성과 접근성 확보가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WHO의 권고는 한국 사회가 미뤄왔던 질문을 다시 꺼내 들게 했다. 비만을 개인 책임의 영역에 둘 것인지, 아니면 공적 관리가 필요한 만성질환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최근 대통령이 비만 치료제 급여 검토를 언급하면서, 보건복지부와 약제급여평가위원회,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관련 기관들도 본격적인 검토 국면에 들어갔다.

한국은 비만 유병률이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고가 치료제임에도 자비 부담으로 이미 상당한 처방 경험이 축적돼 있다. 위고비와 마운자로가 모두 국내에 출시되면서 임상·실사용 데이터(RWD)를 확보할 여건도 갖춰졌다. 급여가 열릴 경우 경쟁이 단기간에 가시화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평가다.

환자 풀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질병관리청이 전국 258개 시군구에서 성인 23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역사회건강조사에 따르면, 체질량지수(BMI) 25 이상으로 의학적 비만에 해당하는 성인은 전체의 34.4%에 달했다. 이는 2015년 26.3%에서 크게 늘어난 수치로, 불과 10년 새 비만 유병률이 약 1.3배 증가한 것이다.

일러스트=챗GPT 달리3

◇WHO가 던진 신호…비만 치료는 ‘장기 관리’, 문제는 비용

WHO는 지난 1일 미국의사협회지(JAMA)를 통해 비만으로 인한 전 세계 경제적 손실이 2030년까지 3조 달러(약 44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며, GLP-1 기반 비만 치료제 사용을 조건부로 권장한다고 밝혔다. 다만 약물 치료는 식이 조절과 운동 등 생활습관 개선과 병행돼야 하며, 장기 안전성과 치료 접근성 확보가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고 대상에는 세마글루타이드(위고비·오젬픽), 터제파타이드(마운자로), 리라글루타이드(빅토자·삭센다) 등 주요 GLP-1 계열 치료제가 포함됐다.

WHO는 동시에 고가의 약가와 공급 제약을 한계로 지목했다. 2030년까지도 전 세계 비만 인구 가운데 GLP-1 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비율은 약 10%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국내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위고비와 마운자로가 국내에 도입됐지만, 위절제술 등 일부 수술적 치료를 제외한 대부분의 비만 진료와 약물 치료는 여전히 비급여다. 이로 인해 환자 부담이 크고, 지난해에는 비대면 플랫폼을 통한 오처방·오남용 논란도 불거졌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마운자로는 국내 출시 후 열흘 남짓한 기간인 8월 20~31일 동안 의약품안전사용서비스(DUR) 기준 총 1만8579건 처방됐다. 일부 날짜에는 하루 처방 건수가 2000건을 넘기기도 했다.

◇급여 논의 본궤도…관건은 ‘누가, 언제, 어디까지’

국내에서도 비만 치료제 급여화에 대한 요구는 학계와 의료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실제로 세마글루타이드 성분의 오젬픽은 지난 10월 약제급여평가위원회로부터 급여 적정성을 인정받았고, 터제파타이드 성분의 마운자로 역시 당뇨병 치료 적응증으로 급여 평가의 첫 관문을 통과했다.

비만 치료제 급여화가 단순한 약값 지원을 넘어, 비만을 공적 관리 체계 안으로 편입시키는 신호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장기적으로는 당뇨병과 심혈관질환 등 주요 합병증을 줄여 의료비 부담을 낮추고,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연구에 따르면 최근 5년(2017~2021년)간 비만의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평균 7%씩 증가했으며, 2021년 기준 약 16조원에 달한 것으로 추산됐다. 의료비뿐 아니라 생산성 손실과 조기 사망에 따른 미래 소득 감소까지 포함한 수치다.

서울 시내의 한 약국에 '처방전 필요 없는 뱃살약'이 입고됐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뉴스1

단,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영국과 미국, 일본은 BMI 기준과 합병증 여부 등 조건을 두고 비만 치료제 비용을 보험에서 지원하고 있다.

영국은 임상적 필요도가 높은 환자군을 중심으로 단계적 급여화를 시작했고, 일본은 BMI 35 이상 또는 BMI 27 이상이면서 동반 질환이 두 개 이상인 환자로 급여 대상을 제한하고 있다.

정희원 저속노화연구소장은 “GLP-1 치료의 목표는 단순한 체중 감량이 아니라 대사 기능의 정상화”라며 “서구 임상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 용량을 빠르게 올리거나, 단기간 사용 후 중단하는 방식은 부작용 위험을 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인은 평균 체중이 낮아 용량을 훨씬 천천히 조절해야 하고, 중단 역시 단계적인 테이퍼링이 필요하다”며 “영양·운동 교육 없이 약물만 처방되는 현재 구조에서는 과사용과 오남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 소장은 “결국 핵심은 적응증을 명확히 하고 개인화된 처방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라​며 “향후 경구제와 소분자 계열 치료제가 등장하면 약가는 급격히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장기적으로는 비용효과성 분석 결과에 따라 일부 GLP-1 계열 치료제가 급여로 편입될 여지도 있다”고 내다봤다.

오지원 연세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도 “GLP-1은 다이어트 약이 아니라 치료제”라며 “현재 시점에서는 BMI가 높거나 대사질환, 심혈관 위험이 동반되는 등 이득이 명확한 환자군에 사용하는 것이 원칙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는 “정상 체중이거나 미용 목적의 사용은 위장관 부작용이나 근육 손실 등 위험 대비 이득이 크다고 보기 어렵다”며 “특히 장기 안전성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무분별한 사용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오 교수는 “급여화는 사회적으로 이득이 크다는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며 “현재 약가 수준을 고려하면 단기적으로 건강보험 재정 부담이 상당할 수 있는 만큼, 극히 고위험군을 중심으로 한 단계적 적용이 현실적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