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 바이오 기업을 견제하기 위해 발의한 ‘생물보안법(바이오보안법·Biosecure Act)’이 미국 국방수권법(NDAA) 상·하원 타협안에 포함돼, 사실상 통과 수순을 밟고 있다.
생물보안법은 미 행정부를 비롯해 관련 기관과 정부 지원금을 받는 기업들이 ‘우려 기업’에 해당하는 중국 바이오 기업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방수권법은 미국의 국방 예산 편성과 정책 기조를 정하는 법안이다.
그동안 생물보안법의 주요 표적 기업으로 중국 우시앱텍, 우시바이오로직스, BGI 등이 지목돼 왔다. 해당 법안이 연내 통과하면 중국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당할 위기에 놓인다. 반면, 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엔 반사 이익을 누릴 기회가 생겼다. 이를 노리는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 다시 속도 붙은 생물보안법…中 우시바이오로직스 위기
생물보안법이 반영된 내년도 미국 국방수권법안(NDAA) 최종 상·하원 통합안이 10일(현지 시각) 미 연방 하원을 통과했다. AP통신에 따르면 통합안은 이날 하원 본회의 표결에서 찬성 312표, 반대 112표로 가결됐다. 이 법안은 상원 통과를 거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서명을 거치면 발효된다.
특히 이번 타협안에서 생물보안법안은 ‘우려 바이오기업’ 지정 절차의 투명성이 강화됐다. 지난해 일부 의원들이 우려 기업 지정 절차가 불투명하고, 대상 기업을 해제할 수 있는 규정이 없다는 점을 들어 생물보안법 통과를 저지했다. 당시 중국 기업들이 미국 내에서 대규모 로비 자금을 지출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는 분석도 미국에서 나온 바 있다.
법안이 상원을 거쳐 최종 통과하면, 글로벌 상위 5대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 중 한 곳인 우시바이오로직스가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관측이 잇따른다. 이 회사의 작년 연매출액은 186억7540만위안(약 3조880억원) 규모다.
현재 글로벌 CDMO 시장은 매출 기준 1위가 스위스 론자(Lonza)이고 삼성바이오로직스 우시바이오로직스, 캐털런트(Catalent)가 2위 경쟁을 해왔다.
생물보안법 시행 영향으로 CDMO 산업 지형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생물보안법 영향으로 우시바이오로직스의 CDMO 사업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위축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우시바이오로직스는 올해 아일랜드와 독일 내 공장을 매각하며 현금 확보에 나섰다. 지난 2일엔 카타르 자유구역청(QFZ)과 전략적 양해각서를 맺고, 중동 시장 진출에 시동을 걸었다. 우시바이오로직스가 중동 지역에서 첫 통합 위탁연구개발·제조센터를 구축하는 게 이번 협약의 주요 골자다.
◇ K-바이오엔 기회…일본, 인도 수혜 가능성도
시장에선 미 생물보안법의 수혜 기업으로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롯데바이오로직스, SK팜테코, 차바이오텍, 삼성바이오에피스, 에스티팜 등이 꼽히고 있다.
당초 예상보다 사업 기회가 더 빨리 열릴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미국 생물보안법이 처음 발의됐을 때는 약 8년의 유예 기간을 둔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현재 공개된 상하원 타협안에는 유예기간에 관한 언급이 안 보인다”며 “의회가 검토를 거쳐 이를 제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법안이 이대로 통과하면 중국 기업과의 거래 제한이나 계약 종료 등의 조치가 바로 실행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도 사업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대표적 곳이 셀트리온이다. 셀트리온은 초기 자본금 100억원을 투입해 CDMO 전문 회사로 ‘셀트리온바이오솔루션스’를 세웠다.
인천 송도에 신규 완제의약품(DP) 생산시설도 짓고 있다. 내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다. 이와 별도로 미국 내 생산 거점도 확보했다. 미국 제약기업 일라이 릴리(Eli Lilly)의 뉴저지주 브랜치버그 공장을 약 4600억원에 인수했다. 회사는 인수 후 최대 7000억 원을 추가 투자해 생산 능력을 키울 계획이다. 미국의 관세 위험을 제거하고자 미국 내 생산 시설을 확보한 것인데, 생물보안법 시행과 함께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 하에 미국 내 생산 이점이 부각되면서 사업 성장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셀트리온 관계자는 “미국 생산시설은 양사 협의에 따라 인수와 동시에 해당 공장에서 생산한 원료의약품을 일라이 릴리에 공급할 예정”이라며 “즉각적인 수익 창출, 현지 공급망 강화, 물류비용 절감 등 효과를 누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분할하고 지주사 삼성에피스홀딩스를 신설하면서 순수 CDMO사로 조직을 재편했다. 회사가 바이오시밀러 사업 분할에 나선 주요 배경이 일부 글로벌 고객사의 이해상충 우려였는데, 이를 해소한 것이다.
삼성바이오는 CDMO 시장에서 현재 생산능력 1위인데 시설을 더 늘리고 있다. 인천 송도에 제2 바이오캠퍼스 건설 중이며 이곳에 2027년 준공, 가동을 목표로 6공장도 짓고 있다.
시장에선 미국 행정부와 빅파마의 리쇼어링(생산시설의 본국 이전·reshoring) 정책으로 미국 내 설비 선호가 커질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현재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국내에만 생산시설이 있다. 이에 시장에선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인수합병(M&A)을 통해 미국 내 생산시설을 확보할 가능성도 거론돼 왔다.
반면, 롯데바이오로직스는 미국 뉴욕 시러큐스 공장을 인수해 가동 중이다. 2027년엔 인천 송도 공장도 준공될 예정이다. 회사는 미국 내 생산시설이라는 입지 경쟁력을 앞세워 항체의약품 뿐 아니라 항체약물접합체(ADC) 위탁 생산 수주를 노리고 있다.
동아쏘시오홀딩스 자회사 에스티팜은 올리고핵산(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 원료의약품(API) 분야에서 글로벌 상위 기업으로 꼽힌다. 올리고핵산은 RNA 치료제의 주원료다. RNA 치료제는 유전물질과 결합해 질병 유발 단백질 생성을 막는 원리의 의약품이다. 이미 에스티팜은 RNA 치료제를 개발한 글로벌 제약사 10곳에 신약 원료를 공급 중이다.
에스티팜도 최근 생산 시설을 키웠다. 중소형부터 대형 라인까지 다양한 규모의 올리고핵산 치료제 생산 능력을 확보하고자 1500억원을 투자해 지난 9월 경기 반월공장 제2 올리고동을 준공했다. 성무제 에스티팜 대표이사는 “제2올리고동 준공을 기점으로 에스티팜은 다양한 시장의 요구에 더 긴밀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SK도 API CDMO 시장에서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SK그룹의 CDMO 자회사 SK팜테코는 올해 3월부터 세종시에 첨단 저분자·펩타이드 생산 공장(5공장)을 증설 중이다. 특히 이곳에서 미국 제약기업 일라이 릴리의 비만치료제 마운자로의 API가 생산될 예정이다. 작년 SK팜테코와 일라이 릴리의 파트너십 계약 사실이 시장에 알려졌는데, 회사는 현재까지 해당 계약에 대해 “확인해줄 수 없다”며 함구하고 있다.
세계 기업들의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생물보안법이 통과에 따른 새로운 불확실성이 생길 수도 있다”며 “기업이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 태국, 인도 등이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며 “특히 일본 후지필름은 미국 내 생산시설을 늘려왔고, 이를 무기로 앞세워 시장을 넓히고 있어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또, 이 부회장은 “정치적 갈등이나 생물보안법과 별개로 한국과 중국 바이오 기업 간 관계, 협력은 중요하다”며 “중국이 연구 개발 성과나 산업적 측면에서 큰 발전을 이뤘다는 점을 인정하고 한국 기업들이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