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기업 성장을 이끌어온 핵심 연구개발(R&D) 리더들의 이탈이 잇따르고 있다. 이직, 은퇴 등 사유는 다양하지만 후임 인선까지의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향후 기업 경쟁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0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최근 주요 기업에서 R&D 수장급 인사들의 퇴사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면서 핵심 파이프라인 전략, 임상 추진력, 글로벌 협업 등 성장축 전반의 연속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특히 각사의 기술수출, 공동 연구, 신약 임상시험 등 실질적 성과를 만들어온 핵심 인물들의 이탈이어서 지속적인 성장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평가다.
에이비엘바이오에서는 창립 멤버이자 글로벌 기술이전 성과를 주도해온 유원규 연구개발본부장(부사장)이 최근 건강 문제로 사의를 표했다.
유 전 부사장은 회사의 주력 기술인 ‘그랩바디’ 이중항체 플랫폼 개발, 항체-약물접합체(ADC) 전략 수립, 비임상·초기 연구 기반 마련 등 회사의 연구 조직의 틀을 만든 인물이다. 올해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미국 일라이 릴리와의 기술이전 계약 과정에서도 주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도 추가 기술이전이 기대되는 시점인 만큼, 지난달부로 회사를 떠난 유 전 부사장의 부재는 연구 전략 조율과 글로벌 협업 측면에서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만 회사는 BBB, 이중항체, ADC 등 주요 모달리티(치료법)별로 책임 리더가 있는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어 단기적인 연구 공백은 제한적이라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상징성 있는 리더가 이탈한 만큼 후임 인선과 조직 재정비는 불가피하다는 관측도 있다.
인공지능(AI) 기반 의료 솔루션 기업 루닛에서도 ‘루닛 스코프’ R&D를 총괄해온 옥찬영 최고의학책임자(CMO·상무)가 지난 9월 회사를 떠났다.
옥 상무는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로 일하다 2019년 루닛에 합류한 뒤, 암 조기진단 AI 솔루션 ‘루닛 인사이트’에 이어 두 번째 성장축으로 육성 중인 면역항암제 반응 예측 플랫폼 ‘루닛 스코프’ 개발을 이끌어왔다.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스위스 로슈 등 글로벌 제약사와의 공동 연구도 주도한 인물이다.
그동안 옥 상무는 스코프 기술 고도화에 집중해왔고, 현재 스코프는 어느 정도 연구 단계에서 상업화 단계로 넘어가는 시점에 있다. 루닛은 그와 함께 스코프 연구를 진행해온 안창호 상무를 신임 CMO로 선임했다. 분당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전문의 출신인 안 상무를 중심으로 향후 스코프 사업화를 본격적으로 가속화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제약업계에서는 R&D 리더의 이탈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업계는 내부 구조 재정비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력 이동이라는 분석이지만, 후임 인선까지 시간이 길어지는 점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유한양행에서는 최근 오세웅 중앙연구소장, 윤태진 R&BD본부 전략실장 등 R&D 핵심 보직자 2명이 퇴사한 데 이어, 임효영 임상의학본부장(부사장), 이영미 연구사업개발(R&BD)본부장(부사장)이 올해를 끝으로 퇴사할 예정이다. 중앙연구소·R&BD본부·임상의학본부 등 김열홍 R&D총괄 사장 아래 주요 조직이 모두 수장을 잃으면서 내부에서도 긴장감이 감지되고 있다.
동아에스티는 지난 10월 박재홍 R&D 총괄사장의 퇴사 이후 해외사업부, 바이오공정연구, 공급망관리 등 주요 사업을 담당해온 류경영 상무, 이건일 연구위원 등이 잇따라 회사를 떠났다. 박 전 사장이 이끌어온 동아쏘시오그룹의 R&D는 성무제 에스티팜 사장이 총괄하게 됐다.
JW중외제약도 박찬희 최고기술책임자(CTO)가 사임한 뒤, 유전자치료제 전문가인 김선영 전 헬릭스미스 창업주를 R&BD 고문으로 영입하며 기술 전략 전면 재정비에 착수했다.
업계에서는 잇따른 인사 이탈 자체보다 후임 선임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백의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신약 개발은 의사결정의 연속성이 핵심이어서 R&D 중심축이 흔들릴 경우 파이프라인 관리나 중장기 전략 수립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최근 전통 제약사들도 바이오의약품 중심으로 개발 전략을 전환하는 분위기여서 인력 구성에도 변화가 나타나는 것 같다”며 “기존 R&D 리더들의 후임은 바이오 분야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커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