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 처인구에 위치한 대웅제약 연구소에서 AI 팀원들이 AI 도구를 활용해 신약 후보 물질이 결합할 단백질 구조를 예측해보고 있다. 몸속에서 병을 일으키는 특정 단백질의 구조를 정확히 알수록 효과적인 신약 후보 물질을 찾아낼 수 있다./장경식 기자

“한국화합물은행에만 60만종 넘는 약물이 있어요. 이 중에서 저희가 겨냥하는 단백질 구조물에 딱 맞는 약물을 찾아내려니 막막하더라고요. 그때 AI를 떠올렸고, 대웅제약에 연락했습니다.”

대한뇌종양학회 회장인 강신혁 고려대 안암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올해 새로운 표적항암치료제를 개발하는 과정에 대웅제약 신승우 AI 팀장에게 ‘SOS’ 친 얘기를 꺼냈다. 대웅제약은 국내 제약사 중에선 가장 먼저 AI 신약개발 전담팀을 만든 곳이다. 강 교수는 대웅제약 AI팀과 손잡고 AI 가상 실험과 분석을 통해 3개월 만에 후보 물질 탐색을 마쳤다. AI가 아니었다면 2년 걸릴 일이었다. 강 교수는 “이전엔 연구팀이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약물을 골라 일일이 실험해야 하니 이 과정에만 몇 년이 걸렸다”면서 “AI로 기간을 혁신적으로 단축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AI가 신약 개발 기간을 크게 단축하면서 바이오 기업에 게임 체인저가 되고 있다. 바이오 R&D, 이 중에서도 신약 개발은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에 한참 뒤처진 영역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국내 주요 기업·기관이 최근 AI 플랫폼 고도화를 통해 2년 걸리는 과정을 3개월로, 10년 걸릴 과정을 2~3년으로 줄이는 AI 기술을 확보해 가고 있다. 제약 업계에서는 AI를 제대로 활용하면 미·중·유럽과 신약 개발 기술 격차를 좁혀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AI 신약 개발 속도 내는 K 바이오

AI 항체 신약 개발 회사 프로티나 윤태영 대표(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본지 통화에서 “3개월 걸릴 항체 검증 과정을 2주로 줄였다. 앞으로 신약 개발 속도는 갈수록 빨라질 것이다”라고 했다. 프로티나는 2027년 말까지 AI로 설계한 10개의 항체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이미 10개 후보 물질 중 3개는 전임상, 1개는 임상 1상을 위한 임상시험계획(IND) 신청 단계로 넘어갔다. 비결은 자체 개발한 AI 고속 항체 스크리닝 플랫폼 ‘SPID’에 있다. 이를 사용하면 몇 개월씩 걸리던 항체 검증 과정을 2주가량으로 줄일 수 있고, 매주 5000개 넘는 항체 서열 데이터를 동시에 분석할 수 있다. 윤 대표는 “이 도구를 사용해 미국 대형 제약사인 애브비의 자가면역질환 치료제인 ‘휴미라’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면서 “3개월 만에 원본 항체보다 효능이 20~100배 뛰어난 바이오베터(개량 바이오 의약품) 후보 물질 검증을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셀트리온은 지난달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 포트래이와 공간 전사체와 AI 기술을 활용한 ‘신약 탐색 공동 연구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우리 몸의 단백질을 만드는 설계도가 RNA라면, 공간 전사체는 이 RNA가 조직의 어느 부분에서 만들어지는지 지도처럼 보여주는 기술이다. 포트래이는 이 공간전사체 데이터를 분석하는 AI 도구를 개발한다. 암 치료제를 개발하는 기업에 유용한 도구다. 포트래이 측은 “우리가 자체 AI 도구를 활용해 만든 표적물질이 십수 건이고, 이 중 셀트리온이 10종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해 전 개발 과정을 맡고 있다”며 “앞으로 글로벌 기업과도 손잡고 신약 후보 물질 개발을 앞당길 계획”이라고 했다.

◇AI 신약 임상 시험도 계속

AI로 신약 후보 물질을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업화를 위한 임상 시험에 도전하는 국내 기업도 늘고 있다. 신테카바이오, 파로스아이바이오, 온코크로스, 닥터노아바이오텍 등 바이오 벤처들이 대표 주자로 꼽힌다. 이들 기업은 뇌졸중, 치매, 아토피, 암 치료 신약을 AI로 개발하고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AI 신약연구원에 따르면 현재까지 후보 물질 9개가 임상 시험 중이다.

이 중 파로스아이바이오는 자체 신약 개발 플랫폼 ‘케미버스’를 활용해 4건의 후보물질에 대한 임상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이 중 급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 후보 물질은 글로벌 2상 진입을 앞두고 있다. 온코크로스도 AI를 활용해 신약을 발굴, 개발하고 있다. 근감소증 치료제, 췌장암 치료제 등을 대표 후보 물질로 갖고 있다.

유한양행, 일동제약, 대웅제약, JW중외 같은 국내 대형 제약사들도 자체 AI 플랫폼을 개발하거나 바이오 업체들과 협업하며 AI 신약 개발에 나서고 있다. 대웅제약 관계자는 “보통 신약 개발에는 임상을 포함해 10년 이상이 소요되지만, AI를 활용하면 이 기간을 2~3년으로 대폭 단축할 수 있다”면서 “국내에서도 조만간 AI로 후보 물질을 발굴하고 임상까지 설계해 개발에 성공한 신약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