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 사망을 확산시킨 대표 제약 회사로 악명이 높았던 퍼듀파마(Purdue Pharma)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다.
14일 뉴욕타임스(NYT)는 미 법원이 퍼듀파마 및 소유주 가문과 집단소송을 제기한 피해자 사이의 10조원대 규모의 민사 합의를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합의안엔 퍼듀파마의 소유주인 새클러 가문이 회사 소유권을 포기하는 한편, 원고인단에게 15년에 걸쳐 최대 70억달러(약 10조2000억원) 규모의 합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에서 최근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제기됐던 오피오이드 소송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합의다. 지방정부·병원·학교뿐 아니라 15만여 명의 개인 피해자들도 이를 통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보상을 받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오피오이드 확산시킨 ‘그 회사’ 사라진다
퍼듀파마는 1952년 정신과 의사였던 3형제 아서·모티머·레이몬드 색슬러 형제가 코네티컷에서 작은 제약사를 인수해 만든 회사다. 이후 이름을 퍼듀파마로 바꾸고 진통제 전문 제약사로 커 나갔다.
처음엔 중소 제약사에 지나지 않았던 퍼듀파마가 유명해진 것은 1996년 옥시콘틴이라는 오피오이드 성분의 마약성 진통제를 개발해 시장에 내놓으면서부터다. 장남인 아서 색슬러는 ‘통증도 병이다’라는 캠페인을 만들고 홍보했다. 몸이 어딘가 아프고 불편한 이들은 거리낌 없이 진통제를 복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옥시콘틴을 먹어도 중독될 일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옥시콘틴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색슬러 가문의 자산은 13조원가량으로 불어났다.
문제는 오피오이드 중독이 걷잡을 수 없는 사회 문제가 되면서부터다.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 전역에서 오피오이드 중독자가 속출했고, 과다 복용으로 숨지는 이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내에서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으로 숨진 이들은 56만4000명에 달한다.
관련 소송도 빗발쳤다. 주 정부와 개인 피해자 등이 퍼듀파마에 제기한 소송만 수천 건이다. 긴 소송전 끝에 퍼듀파마와 새클러 가문은 2019년 파산 보호를 신청하는 한편, 총 60억달러(약 8조7000억원) 규모의 합의금을 내고 집단 소송을 종결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당시 합의문에 새클러 가문을 대상으로 마약성 진통제와 관련 추가 소송을 제기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이 담긴 것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다시 악화됐다. 미 연방대법원은 이에 지난해 6월 해당 합의 파기를 결정했다. 이번 합의는 이후 다시 새롭게 내려진 것이다.
◇새클러 가문과의 소송은 계속된다
이번 합의가 발효되면 퍼듀파마는 즉시 9억달러를 내고 회사를 해산해야 한다. 퍼듀파마는 향후 ‘크노아 파마(Knoa Pharma)’라는 이름의 공익 회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합의 파기 이후 ‘퍼듀파마는 파산 이후 공익 회사로 전환해야 한다’는 조건이 새로 붙었기 때문이다. 새 공익 회사는 오피오이드 해독제 등을 생산하는 한편, 모든 수익을 오피오이드 피해 회복 사업에 쓸 것으로 보인다.
색슬러 가문에 대한 추가 소송은 앞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퍼듀파마에 대한 파산 신청이 허가된 만큼, 퍼듀파마에 대한 소송은 어렵지만, 색슬러 가문에 대한 소송은 할 수 있어서다. 지난 합의가 파기되고 색슬러 가문에 대한 면책도 사라진 덕분이다.
다만 색슬러 가문은 최대 8억달러 규모의 ‘방어 기금’을 조성할 수 있다. 색슬러 측이 “앞으로 소송을 당했을 때 변호사비를 낼 돈을 확보해 달라”는 요구를 했고, 이 요구가 재협상 과정에서 받아들여져서다. 방어 기금은 주정부에 배분될 합의금 중 2억달러를 떼서 먼저 만들고, 이후 소송이 늘어나 방어 비용이 더 필요하면 최대 8억달러까지 기금에서 충당할 수 있다. 기금은 5년까지만 사용할 수 있고, 5년 후 돈이 남으면 이는 다시 주정부로 돌아간다.
◇피해자들, “기대보다 낮은 보상… 소송 이제부터 다시 시작”
파산 법원 측은 보상금 지급은 내년 3~4월쯤 시작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인 피해자들은 보통 7000~1만6000달러 수준의 보상금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NYT는 피해자들이 “기대보다는 낮은 수준”이라고 했다고 보도했다.
피해자 대부분은 오피오이드 중독 사망자의 가족, 혹은 오피오이드 중독인 산모가 낳은 아기를 키우는 이들이다. 이 영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오피오이드 중독 부작용으로 인한 심한 발작 등을 겪어야 했다. 한 피해자 가족은 “앞으로도 우린 계속 긴 싸움을 해야 한다”면서 “오피오이드 제약사와의 소송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