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발전에 쓰고 남은 사용후 핵연료를 영구히 저장하는 ‘고준위 방폐장’과 유사한 깊이에서 방폐장 관련 기술 개발과 안전성을 검증하는 ‘연구용 지하연구시설(URL)’ 건설을 놓고 정부와 원자력 학계 갈등이 커지고 있다. 정부 공모를 통해 선정된 태백시가 연구용 URL 건설에 적합한 부지를 갖추지 못했다고 원자력학회 특별위원회가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URL은 지하 500m에 미니 방폐장 같은 시험 공간을 설치해 인공 캡슐(모형 폐기물)과 관련 장비를 넣고 안전성을 실험·검증하는 시설이다. 방폐장에 핵폐기물을 실제 매립하기 전에 유사한 조건에서 리허설을 해보는 연구소인 셈이다. 내년 설계에 착수해 2032년 완공 계획으로 총사업비 5138억원이 투입된다.
원자력학회 특위는 “지표부터 지하 500m까지 균질한 암반에 URL을 지어야 하는데 태백 지역 부지는 화강암·이암·사암 등이 혼재돼 부적합하다”며 부지 재선정을 주장한다. 사업을 주관하는 기후에너지환경부 산하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은 “(모형 폐기물을 넣는) 처분고가 들어갈 위치가 단일 기반 암석인지가 부지 평가의 핵심 조건이므로 부지 선정에는 문제가 없다”고 반박한다.
◇“500m 아래 화강암 충분” vs “연구 핵심인 중간층은 퇴적암”
지난해 6월 정부의 연구용 지하연구시설(URL) 부지 유치 공모에는 강원도 태백시 한 곳만 신청했다. 부지 선정 평가위원회 평가 등을 거쳐 지난해 12월 태백시가 URL 건설 예정 부지로 선정됐다. URL은 2060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고준위 방폐장 건설을 위한 중간 단계에 속한다. 현재 사용 후 핵연료는 원전 내에 임시 보관 중이다. 하지만 2030년 한빛 원전을 시작으로 2031년 한울 원전, 2032년 고리 원전 순으로 더는 원전 내에 보관할 공간이 없어진다. 지난 2월 ‘고준위 방폐물 특별법’이 여야 합의로 제정됐다. 고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 절차 착수부터 완공까지 37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URL 부지 선정 작업부터 논란이 되면서 전체 사업 일정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원자력학회 특위는 “URL은 안전한 고준위 방폐장 건설을 위한 필수 시설로, 앞으로 실제 방폐장을 건설하게 될 지질과 가장 유사한 조건에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부지 선정위가 암반의 연속성 등 중요 사항 배점을 15점으로 낮게 책정한 것도 불합리하다”고 지적한다. 안전을 위한 핵심 요소가 전체(가점 포함 105점 만점)의 14%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특위 관계자는 “균일한 암반은 부지의 적합·부적합을 결정하는 핵심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지질 이외의 요소가 더 큰 배점이 부여됐다”며 “신청한 지자체를 어떻게든 후보지로 선정하려고 한 것 아닌가 의심이 든다”고 했다. 특위는 또 “방폐장 안전성 평가는 방사성 폐기물이 누출될 경우 지표면 생태계까지 도달하는 경로와 시간을 예측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이번에 선정된 부지는 중간에 사암, 이암 등 퇴적암층이 있어서 적합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원자력환경공단은 “태백 부지는 지하 500m 이하 심도에 화강암층 기반암이 충분히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며 “세부 배점은 평가위원회가 분과별 논의와 전체 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확정한 것으로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정부는 사업 속도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위원회는 “지금까지 제기된 문제에 대한 전문가 공개 토론회를 다음달 태백시에서 열고, 여러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국민적 신뢰를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예비타당성 검토 면제도 추진할 방침이다.
반면 학계는 부지 검증 과정 및 데이터 공개 확대, 평가 절차 재검토 등을 요구하며 총력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윤종일 KAIST 교수는 “과학적 기준이 흔들리면 국민 신뢰도 무너진다”며 “필요하다면 추가로 문제를 제기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국내 전문가들은 “기술적 타당성과 지역 신뢰가 함께 확보돼야 장기 사업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핀란드는 URL로 출발해 이를 처분시설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방폐장 기술을 실증하고 있고, 스웨덴은 수십 년 동안 지자체와 주민 동의 절차를 거쳐 URL을 구축하며 관련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해 사회적 신뢰를 쌓았다.
일본 역시 URL을 운영하며 암반 특성과 지하수 이동 연구 결과를 장기 축적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고준위 방폐장 부지를 찾는 절차에도 착수하지 못했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과 관련한 정책 신뢰·기술 검증·주민 수용성은 한국 원자력 정책의 최대 난제다. 이번 URL 부지 논란도 앞으로 고준위 방폐장 건설의 성패를 좌우할 첫 시험대로 꼽힌다.
문주현 단국대 교수는 “고준위 폐기물 관리 정책은 천년대계에 해당하는 국가 사업이므로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수십 년 뒤 훨씬 더 큰 비용과 갈등을 치르게 된다”며 “공단과 지자체가 잘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국가 미래를 위해 재검토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연구용 지하연구시설(URL)
URL(Underground Research Lab)
고위험 사용후 핵연료 영구 저장시설인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과 유사한 지질환경(심도 약 500m)에서 방폐장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고 안전성 검증 등을 수행하는 시설이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이나 사용후 핵연료는 반입되지 않는다. 스웨덴, 프랑스, 미국, 일본은 고준위 방폐장 부지선정 이전부터 URL을 구축해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