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두께보다 얇은 전자칩과 특수 안경 덕분에 시력을 완전히 잃은 환자들도 다시 글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이른바 ‘전자 눈 임플란트’ 기술이다. 기술이 더 발달하면 시력을 잃었던 이들도 다시 앞을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커지고 있다.
20일 뉴욕타임스, 가디언 등에 따르면, 미국 스탠퍼드 의대 안과의인 다니엘 팔랑커(Palanker)교수팀은 5개 나라 17개 병원에서 노인성 황반변성 환자 38명을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진행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 해당 연구 내용은 지난 20일 국제 학술지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도 게재됐다
◇전자칩과 특수 안경으로 실명 환자도 시력 되찾아
팔랑커 교수팀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 있는 17개 병원에서 노인성 황반변성 환자 38명을 모았다. 노인성 황반변성은 나이가 들면서 망막의 중심부인 황반 세포가 서서히 죽어가면서 시력이 떨어지는 병이다. 심하면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미국엔 현재 중증 황반 변성 환자가 약 100만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진 딱히 근본적인 치료법이 없다.
연구팀은 이에 임상 시험 참가자들에게 ‘프리마(PRIMA) 디바이스’라는 초소형 전자칩을 이식했다. 눈 망막 아래 ‘망막하’에 광전 마이크로칩을 심은 것이다. 이 칩의 크기는 가로 2㎜, 세로 2㎜ 정도. 두께는 30㎛ 정도로 머리카락보다 얇다. 칩 내부에는 광전 셀 378개가 탑재됐다.
이 전자칩은 망막에서 받은 빛을 전기 신호로 바꿔주는 역할을 했다. 광전 셀이 작은 태양전지 패널처럼 작동해, 따로 배터리도 필요 없었다.
이식 수술 후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특수 안경을 씌웠다. 안경엔 카메라가 달렸다. 휴대용 컴퓨터(pocket computer)도 몸에 달아줬다. 안경에 달린 카메라가 주변 세상을 촬영해 근적외선(IR) 빛 형태로 칩에 쏴주면, 휴대용 컴퓨터는 인공지능(AI)으로 카메라가 찍은 영상을 칩이 인식하도록 처리했다. 칩은 영상을 전기 신호로 바꿔 뇌 시각피질로 보낸다. 참가자들은 이를 통해 ‘눈이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됐다. 안경으로 밝기를 조절하고 최대 12배까지 확대할 수도 있다.
수술 후 38명 중 27명은 시력이 개선돼 눈이 보이는 것을 경험했다. 글자를 다시 읽을 수 있었고 표준 시력표에서도 평균 5줄 이상을 더 읽을 수 있게 됐다. 일부는 식료품 포장에 적힌 글씨,지하철 표지판을 읽을 정도까지 시력을 회복했다. 가디언지에 따르면, 영국 윌트셔 출신의 한 환자는 “수술 전엔 눈앞에 두 개의 검은 원이 떠 있는 것만 보였으나, 수술 이후엔 글자와 숫자를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번 임상 시험은 미국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업체 ‘사이언스 코퍼레이션’과 함께 진행됐다. 사이언스 코퍼레이션의 CEO 맥스 호닥은 일론 머스크와 함께 뉴럴링크를 설립했던 인물.
◇흑백인 것은 한계
한계도 있다. 이 장치를 통하면 사물이 아직까진 ‘흑백’으로만 보인다는 것이다. 이 전자 칩은 빛의 색깔(파장)을 구분하지 않고, 밝기 신호(빛의 세기)만을 감지해 전기 자극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해상도가 낮은 것도 아쉬운 점이다. 일부 환자들은 “글씨를 읽을 수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눈앞이 흐릿하게 보인다”고 했다. 이때문에 아직 사람의 얼굴 인식을 하긴 쉽지 않다. 스탠퍼드 연구팀은 “얼굴 인식을 하려면 명암 단계(grayscale)가 필수이기 때문에, 이를 곧 소프트웨어로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수술 후 19명 정도는 또한 안압 상승, 망막 찢김, 출혈 등을 겪기도 했다. 다만 이들 대부분은 2개월 안에 이 같은 부작용을 모두 회복했다.
훈련이 필요한 것도 아쉬운 점이다. 임상 시험 참가자들은 특수 안경과 휴대용 컴퓨터를 착용하고 수개월간 재활을 하면서 ‘사물을 보는 방법’을 새로 훈련해야 했다.
연구팀은 그럼에도 “이 전자 눈 임플란트는 실명한 눈으로 다시 글자, 숫자, 단어를 읽게 해준 세계 최초의 장치”라면서 “완전히 실명한 환자가 실제로 중심 시력을 되찾은 첫 사례”라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100만명의 중증 황반변성 환자에게도 희망이 생긴 임상 시험 사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