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호주 멜버른대에서 리처드 롭슨 교수는 학생들이 나무 공에 막대를 연결해 분자 구조 모형을 만들 수 있도록 나무 공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어디에, 어떤 방향으로 구멍을 낼지 고민하던 그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구멍의 위치 자체가 이미 분자의 설계도 아닌가?’ 구멍을 내는 좌표와 각도가 곧 분자 구조를 결정한다는 통찰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롭슨 교수는 구리 이온에 유기 분자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구조체를 만드는 실험을 했다. 그의 예상대로 이온과 분자가 자기 조립으로 규칙적 격자를 이루었고, 내부에 수많은 구멍이 촘촘히 생겼다.
◇“화학 위한 새 집 만들어”
올해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된 롭슨 교수의 결정적 연구 성과는 이런 과정을 거쳐 열매 맺었다. 이번에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1989년 롭슨이 미국 화학회지에 혁신적인 화학적 창조물을 발표했다”며 “그는 특정 화학물질에 최적화된 넓은 내부를 가진 결정성 골격체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노벨 화학상 수상 연구인 ‘금속 유기 골격체(Metal-Organic Frameworks·MOF)’의 첫발을 롭슨 교수가 내디뎠다는 것이다.
MOF는 쉽게 비유하자면 빈방이 많은 ‘분자 아파트’다. 물 분자에 원룸, 이산화탄소에 투룸을 제공하는 공동주택 같은 구조인 셈이다. 금속 이온(기둥)과 유기 연결 고리(가로빔)가 레고 블록처럼 연결돼 건물 뼈대를 이룬 것으로 빗댈 수도 있다.
개발 초기 밋밋하고 허약한 아파트를 강하고 다양한 모습의 아파트로 발전시킨 인물이 공동 수상자 기타가와 스스무 일본 교토대 교수와 오마르 야기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 버클리) 교수다. 기타가와 교수가 1992년에 발표한 다공성 결정체는 별로 쓸모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1997년에 메탄, 질소, 산소를 흡수하고 방출할 수 있는 MOF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다양한 손님이 오갈 수 있는 건축물을 설계한 셈이다. 이듬해 그는 유연한 형태의 MOF를 선보였다. 그가 개발한 MOF는 물이나 메탄으로 채워지면 모양이 바뀌고, 비워지면 원래의 형태로 돌아갔다.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폐처럼 형태가 유연하면서도 안정적으로 기능하는 MOF를 내놓은 것이다.
◇10만종 이상 MOF 만들어져
이와 비슷한 시기인 1995년, 당시 애리조나주립대 교수였던 오마르 야기는 강력한 MOF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망상(그물 모양) MOF’다. 이는 빈 공간이 다른 분자로 채워지면 섭씨 350도로 가열해도 붕괴되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 구조였다. MOF라는 용어도 당시 야기가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으로 이름 붙였다. 1999년 야기는 골격체 내부가 비어 있는 상태에서도 섭씨 300도로 가열해도 끄떡없는 MOF를 내놓았다. 이 MOF는 몇 그램만으로도 표면적이 축구 경기장과 맞먹어 엄청나게 많은 기체 분자를 흡착할 수 있다. 실제로 야기는 사막 공기 중 수증기를 MOF로 포집해 마실 물을 얻는 실험도 성공시켰고, 상업화를 위해 창업도 했다.
이번 수상자들이 주춧돌을 놓은 MOF는 이후 세계 연구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불어넣으면서 수많은 종류의 MOF가 개발되는 계기가 됐다. 예컨대 오염된 물에서 원유 성분을 분리하거나, 대량의 수소나 이산화탄소를 저장하는 등 다양한 용도의 MOF가 등장했다. 영원한 화학물질로 불리며 유해성 논란이 있는 과불화 화합물(PFAS)을 흡수하거나, 폐수에서 희토류 원소를 채굴하는 데 쓰이는 MOF도 개발됐다. MOF의 기공 벽에 희토류만 잘 붙게 만든 뒤, 흡착된 이온을 떼어내는 식이다.
상당수 MOF가 상용화돼 반도체 공장에서 독성 가스를 제거하거나,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쓰인다.
UC 버클리에 따르면, 현재까지 특정 용도에 맞게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진 10만 개 이상의 독특한 MOF 구조가 합성됐다. 야기가 개발한 MOF 가운데 일부는 발전소나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할 수 있다.
지난해 야기 교수는 여러 유기물이 강력한 공유 결합을 이룬 다공성(多孔性) 물질 ‘COF-999’를 개발하는 성과도 냈다. COF는 공유(共有) 유기 골격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마법의 노란 가루’로 불리는 COF-999는 200g으로 이산화탄소 약 20㎏을 흡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나무 한 그루가 1년간 흡수하는 이산화탄소량과 맞먹는다.
과학계는 다양한 목적에 따라 AI(인공지능)로 MOF를 설계하는 시대가 왔다고 보고 있다. 노벨위원회는 “MOF를 개발해 난제들을 해결한 이번 수상자들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처럼 인류에게 큰 혜택을 가져다줬다”고 평가했다.
☞MOF
‘금속-유기 골격체’(Metal-Organic Frameworks)라고 한다. 금속이온과 유기 분자가 정교하게 연결돼 형성된 다공성(多孔性) 물질로, 내부에 미세한 구멍이 촘촘히 있어 기체를 저장하거나 분리하고, 촉매나 약물 전달체로도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