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학에서 정년을 마친 이공계 석학의 외국행이 잇따르고 있다. 1988년 28세에 최연소로 카이스트 조교수로 임용되면서 화제가 됐던 통신 분야 석학 송익호 카이스트 명예교수가 지난 2월 정년 퇴임한 뒤 중국 청두 전자과학기술대(UESTC) 교수로 간 사실이 최근 알려졌다. 젊은 인재에 이어 정년 퇴임 전후의 석학들이 해외로 떠나는 ‘시니어 두뇌’ 유출이 이어지는 것이다. 국내에서 65세라는 경직된 교수 정년 규정, 사회적 존중이나 안정적 지원이 부족한 과학기술 홀대론, 연구 단절 공포가 석학들을 해외로 몰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시니어 두뇌 유출은 수십 년 축적해온 연구 노하우·경험 상실, 후학 양성 기회 박탈, 국내 연구 역량 약화 등 국가 지식 자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국가 안보와 관련된 민감 기술이 유출될 수 있는 위험도 제기된다.
세계 각국이 인재 쟁탈전을 벌이는 가운데 우리나라 역시 외국으로 떠난 젊은 인재를 되돌리고, 외국인 인재 유치에 더해 시니어 두뇌들이 외국의 대학·연구원이 아닌 국내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고(高)경력 과학 기술인의 인적 활용 방안을 연구해온 김인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박사는 “주요 국가들은 정년 연장이나 폐지를 통해 업적이 뛰어난 과학기술 석학에게 원할 때까지 계속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면서 “정년 이후 연구 트랙을 다양화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안준모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시니어 과학기술인을 중견·대기업과 매칭해 연구를 이어가고 연구 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60대 이공계 석학 모이면 하는 말 “中이 어떤 제안 했나”
“며칠 전 상하이 시내에서 길을 묻는 대학생들과 마주쳤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푸단대에서 물리학을 가르친다고 했더니 ‘기초과학 석학 아니냐’면서 사인을 해달라고 해요.”
지난 2018년 말부터 중국 상하이 푸단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이영백 전 한양대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최근 본지와 전화 통화에서 “이공계 연구자들이 한국에서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상반된 풍경이라 새삼 놀랐다”며 들려준 말이다. 이 교수는 중국 정부가 최고 과학자 직책인 ‘양원(중국과학원·중국공정원) 원사’를 부여하고 스카우트해 간 국내 1세대 이공계 석학이다. 연구 공간과 5성급 호텔 거주, 연구비, 한국 왕복 무제한 항공료를 받았다. 1년에 넉 달만 상하이에 머물러도 계약이 유지된다. 이 교수는 “연봉 같은 현실적 조건도 좋았지만, 이공계 학자를 파격 우대하고 존중하는 중국 대학과 정부 태도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했다.
◇한국 석학 모셔가는 중국
‘명태 박사’로 알려진 해양생물학 권위자 김수암 부경대 명예교수도 정년퇴임 다음 해인 2019년부터 중국 칭다오의 중국해양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정년을 앞두고 거취를 고민하는 김 교수에게 중국 해양대가 먼저 연락해 영입을 제안했다고 한다. 김 교수의 지인은 “방문 강연을 갔다가 그곳 학생들이 치열하게 공부하는 모습, 강연 열기, 해외 이공계 학자들의 정보를 빠르게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영입하는 중국 교육 기관의 태도에 감명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2005년 첫번째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던 이영희 전 성균관대 석좌교수, 이기명 전 고등과학원 부원장과 김수봉 전 서울대 교수도 최근 몇 년 사이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윤영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부원장은 서울대 석좌교수로 정년을 마칠 즈음 미국·중국 대학·기관 여러 곳에서 영입 제안이 왔다고 한다. 미국 대학들은 원할 때까지 일할 수 있는 ‘영년 교수(tenure)’ 보장을 내걸었고 연봉도 2배 이상 제시받았다. 김 교수는 “중국은 더 센 연봉을 제시하는 곳도 있었다”면서 “정년 맞은 교수들끼리 모이면 중국에서 어떤 파격적인 제안을 받았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돈 때문?… “연구 계속하고 싶어서”
시니어 인재들이 개인적 명예나 돈을 좇아 해외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평생 쌓아 올린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과 국내에서 더는 연구를 지속할 수 없는 현실적인 장벽 탓에 외국행을 택한다고 한다.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은 현직 연구자에게 집중돼 정년 퇴임한 연구자들이 연구 과제를 따내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정년을 앞둔 수도권 소재 이공계 교수는 “중국 대학이 영입을 제안해왔을 때 ‘연구 성과가 단기간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기초과학은 원래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더라. 한국에선 결코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가진 원로 과학기술인들을 국가적 자산으로 여기고 활용하기보다는 은퇴 세대로 치부하며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연구 분위기도 시니어 인재들을 허탈하게 만든다. 서울대에서 정년을 맞고 은퇴한 한 석학은 “석좌교수가 되는 순간부터 학교 밖 내 자리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 시작된다”면서 “말이 석좌교수이지 교수법상 강사이고 어떤 학교는 ‘석좌교수가 명예직이니 월급은 학교에 기부하면 어떻겠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연구만 편하게 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했다. 국책 연구원의 한 박사는 “지난 정부의 R&D 예산 삭감처럼 국책 연구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 나라에선 더 못 있겠다고 토로하는 과학자들이 많았다”고 했다.
◇“무형문화재 보유자처럼 예우 시스템 필요”
정부는 정년을 마친 석학 중 누가 외국 대학이나 기관으로 자리를 옮겼는지 기본적인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뒤늦게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되는 수준이다. 정부는 ‘리싯(ReSeat) 석학’이라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이를 통해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고경력 우수 연구원들의 데이터를 모으겠다고 했지만, 실제 본인의 개인 정보를 스스로 입력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과기부 관계자는 “국내 이공계 석학들이 퇴직 전 자신의 정보를 반드시 입력하도록 강제하기 어렵고, 은퇴한 이후엔 더욱 연락이 안 돼 어디에서 활동하시는지 파악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김윤영 교수는 “나라가 정년을 넘긴 석학들을 국가무형문화재 대하듯 예우하고 존중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