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성 뇌전증의 원인을 규명한 KAIST 의사과학자가 연구 성과를 신약 후보 물질 개발로 이어가며 7500억원 규모의 기술 수출에 성공했다. 국내 의사과학자 대다수가 연구 대신 병원 진료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로 평가된다.
KAIST는 의과학대학원의 이정호 교수 연구팀이 창업한 기업 ‘소바젠’이 이탈리아 글로벌 제약사 안젤리니 파마에 난치성 뇌전증 신약 후보 물질을 약 7500억 원(5억 5000만 달러)에 기술 이전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9일 밝혔다.
연구팀은 난치성 뇌전증과 악성 뇌종양의 원인이 뇌 줄기세포에서 생긴 후천적 돌연변이(체성 돌연변이)임을 최초로 규명해 2015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 2018년 네이처 메디슨에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연구팀은 돌연변이 유전자인 MTOR를 직접 겨냥하는 RNA 신약 후보 물질을 발굴해 이번 기술 수출을 성사시켰다.
KAIST는 “이번 성과는 의사과학자인 이정호 교수가 연구와 창업을 결합해 이룬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기초 연구실에서 출발한 아이디어가 창업 기업을 통해 세계 최초 신약 후보로 발전하고 글로벌 시장으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 것”이라고 했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이 교수는 같은 대학에서 신경약리학 박사를 취득하고 2012년부터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번 신약 후보 물질은 소바젠 박철원 대표와 공동으로 개발했다. 이정호 교수는 “KAIST는 혁신과 산업화를 중시하는 연구 문화를 갖춰 기초 연구와 신약 기술 수출이라는 두 가지 성과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다”고 했다.
KAIST 의사과학자의 이번 성과는 국내에서는 아직은 예외적 사례로 꼽힌다. 대다수 의사 과학자는 오랜 기간 연구를 이어가는 대신에 병원 현장으로 돌아가는 현실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대가 2018년부터 배출한 의사과학자 48명 중 22명(46%)이 병원 등 의료기관으로 진로를 정한 것으로 집계됐다. 앞서 서울대는 의학 연구 중심 인재를 키우기 위해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을 시작했지만 대다수가 임상 의사로 돌아가 프로그램 취지를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지부의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 사업’에서도 총 77명 가운데 34명(44%)이 순수 연구 분야로 진출하는 데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