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여성들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있다. “결혼은 언제 하니?” “아이 계획은 없니?” 시대가 바뀌어도 이런 질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노산(老産)’이라는 단어가 따라붙고, 나중에 아이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 탓이 아닐까 걱정된다.
과학자들은 여성들의 걱정을 덜어주고 있다. 여성의 난자는 실제 나이만큼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난자의 시계는 더 천천히 흐르는 셈이다. 난자의 ‘저속 노화’ 비결을 밝히면 불임 치료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난자는 다른 세포보다 돌연변이 적어
인간을 포함해 포유류는 나중에 난자가 될 난모세포(oocyte)를 갖고 태어난다. 다른 인체 세포와 달리 난모세포는 수명이 길다. 40년 이상 건강하게 살기도 한다. 배란된 난자의 수명은 12~24시간에 불과하지만, 미성숙 난자는 수명이 훨씬 긴 셈이다. 과학자들이 난모세포가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을 하나하나 밝혀내고 있다.
지난 8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카테리나 마코바(Kateryna Makova) 교수와 바바라 아르바이투버(Barbara Arbeithuber) 박사 연구진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여성 난모세포의 미토콘드리아DNA(mtDNA)가 나이가 들어도 변이를 거의 쌓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유전물질인 DNA는 대부분 세포핵에 있지만, 세포질에 있는 에너지 생성기관인 미토콘드리아에도 0.1% 정도가 있다. 아기는 엄마의 난자로부터 미토콘드리아DNA를 물려받는다. 여기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뇌나 근육, 심장이 심각하게 손상되는 유전질환이 발생한다.
연구진은 20~42세 여성 22명으로부터 미성숙 난자 80개와 함께 혈액, 구강세포, 타액을 채취해 비교 분석했다. 이를 위해 ‘초고정밀 이중 시퀀싱(duplex sequencing)’이라는 특수한 분석법을 사용했다. DNA의 양쪽 가닥을 모두 읽고 비교함으로써 분석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오류를 거의 완전히 걸러내는 방법이다. 덕분에 난자의 DNA 변화를 미세한 수준까지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혈액이나 구강세포, 타액에서는 나이가 많을수록 유전자 돌연변이가 확연히 늘어났지만, 난자는 그렇지 않았다. 변이가 많이 생긴 난자에서는 핵심 기능을 담당하는 DNA 영역보다 특별한 기능이 없는 부분에서 주로 변이가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를 ‘정화 선택(purifying selection)’의 결과로 해석했다. 정화 선택이란 생명체가 해로운 변이를 스스로 걸러내고, 필수 기능은 지키는 자연의 자기 방어 장치다. 쉽게 말해, 인간의 난자는 시간이 흘러도 핵심 기능을 담당하는 DNA를 보호하고, 덜 중요한 부분에서만 작은 변이가 생기도록 설계돼 있다는 것이다.
마코바 교수는 “보통은 나이가 들면 변이가 늘어난다고 생각하지만, 기대가 언제나 진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며 “인간은 늦은 나이에도 번식할 수 있도록 미성숙 난자가 스스로를 지키는 메커니즘을 진화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노폐물 처리 속도 줄여 활성산소 방지
난모세포의 저속 노화 비결은 또 있다. 지난 7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게놈조절센터(CRG)의 엘반 보케(Elvan Böke) 박사 연구진은 “미성숙 난자는 스스로 노폐물 청소 속도를 늦추며 세포 손상을 최소화한다”고 국제 학술지 ‘유럽분자생물학회(EMBO) 저널’에 발표했다.
리소좀과 프로테아좀은 세포에서 노폐물 단백질을 분해하고 재활용한다.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인 셈이다. 그러나 청소 과정에서는 에너지가 필요하고, 활성산소라는 해로운 부산물이 만들어져 DNA와 세포막이 손상될 수 있다. 미성숙 난자는 이런 손상을 막기 위해 일부러 청소 속도를 늦췄다.
연구진은 19~34세 여성 21명으로부터 얻은 100여 개 미성숙 난자를 분석했다. 난자의 리소좀·프로테아좀·미토콘드리아 활동은 주변 세포의 50% 수준이었고, 세포가 성숙할수록 점점 느렸다. 배란 직전에는 난자가 리소좀을 세포 밖으로 밀어내며 ‘대청소’를 하는 장면도 확인됐다.
보케 박사 연구진은 2022년 ‘네이처’에 발표한 연구에서 미성숙 난자가 일부 대사 과정을 의도적으로 건너뛰어 활성산소 생성을 억제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세 연구를 종합하면, 인간의 난자는 변이로부터 핵심 DNA를 보호하고, 에너지 절약과 청소 속도 조절이라는 전략으로 스스로를 지켜온 셈이다.
참고로 보케 박사는 지난해 유럽의 생명과학에 뛰어난 공헌을 한 40세 미만 연구자에게 수여되는 EMBO 메달을 받았다. 그는 미성숙 난자인 난모세포가 수십 년 동안 휴면 상태에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생리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를 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명절마다 여성들이 그렇게 듣기 싫은 질문을 받을 때, 두 여성 과학자들의 발견을 떠올려보자. 시간이 지나도 당신의 몸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현명하다.
참고 자료
Science Advances(2025), DOI: https://doi.org/10.1126/sciadv.adw4954
The EMBO Journal(2025), DOI: https://doi.org/10.1038/s44318-025-00493-2
Nature(2022),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2-049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