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14일(현지 시각) 차기 미국 보건부(HHS) 장관에 백신 회의론자인 로버트 케네디 F 주니어(70)를 지명했다./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차기 미국 보건부(HHS) 장관에 백신 회의론자인 로버트 케네디 F 주니어(70)를 지명하자 글로벌 제약사들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도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며 긴장감이 커지는 분위기다.

트럼프는 지난 14일(현지 시각) 성명을 통해 케네디를 보건부 장관으로 발탁했다고 밝혔다. 케네디는 이번 미국 대선에서 무소속 후보로 도전했으나, 지난 8월 트럼프 행정부에서 핵심 역할을 맡는 대가로 후보에서 사퇴하면서 트럼프를 지지했다.

트럼프는 “미국인들은 너무 오랫동안 공중 보건과 관련해 사기, 잘못된 정보,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산업 식품 복합체와 제약 회사에 짓밟혀왔다”며 “보건부는 유해한 화학물질과 오염물질, 살충제, 의약품, 식품 첨가물로부터 우리 국민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보건부는 식품의약국(FDA),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립보건원(NIH)를 비롯해 공보험인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서비스를 감독하는 미국 최고 보건 기관이다. 보건부 예산은 올해 회계연도 기준 미국 연방 예산의 22.8%를 차지할 정도로 정부 예산에서 비중이 크다.

케네디는 지난 수십년간 백신에 대한 불신을 표하며, 각종 음모론을 퍼뜨려온 인물이다.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주장은 물론 연방기관이 홍역, 독감을 비롯해 다른 전염병의 백신에 대해 충분한 연구를 하지 않은 채 사용을 승인했다고도 했다.

결정적으로 케네디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 반(反)백신 단체인 어린이 건강 지킴이(Children’s Health Defense)를 설립해 백신 접종 반대 운동과 백신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데 집중했다. 결국 이 단체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SNS)에서 활동이 차단되기도 했다.

외신에 따르면 트럼프의 보건부 장관 지명 소식에 미국을 비롯해 글로벌 제약·바이오 업계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백신과 의약품에 대한 불신을 가진 인물이 수장이 되면 인허가에서부터 제동이 걸릴 것이란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글로벌 제약사인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엠마 웜슬리 최고경영자(CEO)는 “미국을 다시 건강하게 만들겠다는 케네디의 모토가 이론적으로는 좋은 생각”이라면서도 “그의 지명으로 전 세계 백신 접종률 저하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미국 화이자에서 과거 글로벌 R&D를 맡았던 존 라마티나 전 사장은 언론에 “어떻게 백신 반대론자를 보건부 장관에 임명할 수 있나”라며 “백신이 수백만, 수천만명의 생명을 구하면서 대유행에서 벗어난 직후에 이런 사람에게 의료 시스템 전체를 맡기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비판했다.

미국 제약협회(PhRMA)도 백신을 비롯한 제약·바이오 혁신을 강조하며, 케네디 지명에 우려를 나타냈다. 스테판 우블 제약협회장은 “그동안 제약·바이오 혁신은 암 생존율을 극적으로 개선하고, C형 간염을 치료하고, 소아마비와 천연두 같은 치명적인 질병을 퇴치하는 등 질병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진전을 이뤘다”며 “미국 경제의 핵심이기도 한 제약산업 성장을 위해 협력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케네디는 퍙소 비만과 당뇨, 자폐를 포함한 만성 질병 유행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전 세계에 비만 치료제 위고비 열풍을 가져온 덴마크의 노보 노디스크를 겨냥해 “그들의 약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 어리석고 마약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케네디 지명 소식에 노보 노디스크와 경쟁 비만약인 마운자로를 개발한 미국 일라이 릴리의 주가는 동반 하락했다.

케네디가 보건부 장관에 오를 경우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도 적잖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당장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재국 한국제약바이오협회 부회장은 “백신을 포함해 의약품의 효능 자체에 불신을 품고 있어, 앞으로 제약·바이오 정책 예측이 불가능해졌다”며 “새정부 출범 전부터 이러한 우려가 기업들의 신약개발 노력에 영향을 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도 “불확실성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의 의견과 한 기관의 장으로서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우리 정부의 미국과의 외교 역량은 물론, 국내 투자 기업들에 대한 세제 혜택을 비롯한 정책을 지원해 국내 바이오 생태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