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노보 노디스크제약이 한국보건산업진흥원과 함께 ‘노보 노디스크 파트너링 데이’를 열었다. 이 회사는 최근 ‘꿈의 비만약’ 삭센다와 위고비로 세계 제약 시장을 뒤흔든 덴마크 노보 노디스크의 한국 법인이다. 이날 노보 노디스크는 당뇨병과 비만, 심혈관질환 분야에서 협력하기를 원하는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신생벤처기업) 56곳 중 사이키바이오텍을 최종 파트너로 선정했다. 사이키바이오텍은 노보 노디스크로부터 상금 3000만원과 함께 1년 간 신약 멘토링을 받는다.
사이키바이오텍은 2020년 KAIST 박사 출신인 김은영 대표가 대전에서 창업한 의약학 연구개발(R&D) 기업이다. 항체를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인 앱타머와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부작용을 최소화한 비만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앱타머는 특정 물질에 대해 특이한 결합 능력을 가진 DNA이다. 김 대표는 노보 노디스크 파트너링 데이에서 최종 선정된 후 “현재 개발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 방향을 제시 받았다”며 “이를 기반으로 추후 협업과 그 방법에 대한 논의까지 진행돼 더욱 뜻 깊은 수상”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신약 파이프라인을 확대하기 위해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을 발굴, 지원하는 협력 관계를 확대하고 있다. 회사 밖에서 신약 후보물질이나 기술을 확보하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이다. 특히 과거에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개별적으로 스타트업을 찾아 투자했다면, 최근에는 정부 기관과 손잡고 스타트업들이 공개 경쟁을 벌이는 오디션 형식의 공모전을 열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신약 파이프라인(후보군)을 확대할 기회가 되고, 스타트업들은 글로벌 제약사의 경험을 전수받고 투자 유치도 할 수 있어 ‘윈윈(win win·상호 이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의 시각 이해한 기회”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들은 글로벌 제약사들이 주최한 공모전을 통해 기술 경쟁력을 확인하고 해외 업체와 협력할 기회를 얻었다. 스위스 국적의 글로벌 제약사인 노바티스도 2020년부터 매년 ‘헬스엑스챌린지 서울’이라는 오픈이노베이션 공모전을 열고 있다. 2022년 우승한 바스젠바이오는 한국인 15만6000명의 유전자 정보에서 신약이 공략할 유전자를 발굴하고 있다. 또 다른 제약사가 개발한 신약을 임상시험 전에 가상으로 시뮬레이션(가상실험)할 수 있는 AI(인공지능) 솔루션(DEEPCT)도 개발했다.
바스젠바이오는 노바티스 공모전에서 우승하고 상금 4000만원을 받고 지난 2년간 노바티스와 3개월마다 멘토링, 코칭을 받았다. 이 회사는 같은 해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제약사인 암젠이 주최한 공모전 ‘피칭데이’에서도 2위에 뽑혔다. 당시 암젠으로부터 2500만원 상금을 받았다.
김재원 바스젠바이오 이사는 “우리 기술 경쟁력으로 세계 시장에 어떻게 나가야 할지 길을 터주는 기회가 됐다”며 “암젠이 5500억달러에 인수한 디코드제네틱스와 미팅한 것을 계기로, 국내외 대형 제약사들과 협업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디코드제네틱스는 아일랜드에 있는 기업으로 바스젠바이오처럼 유전자 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곳이다. 김 이사는 “우리 기술 경쟁력으로 대형 제약사와 협업하거나 기술 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한국에서 디코드제네틱스 같은 모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바스젠바이오는 현재 국내 한 기업과 자가면역질환의 원인일 것으로 추정되는 유전자 8개를 발굴해 세포실험을 하고 있다. AI로 다른 국내 기업이 개발한 근감소증 약물의 치료 효과를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했다. 현재 이 약물은 임상 2상 시험 중이며 올해 12월에 결과가 나온다. 해당 약물이 실제 허가를 받을 경우 시장 가치 약 1조원 이상으로 예상된다.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인 바이온사이트는 2022년 일본에 본사를 둔 글로벌 제약사인 다케다가 주최한 공모전 ‘콕핏 펀딩’에서 최종 선정돼 지원금 500만엔(약 4300만원)을 받았다. 바이온사이트는 약물과 단백질들 간의 상호작용을 효율적으로 측정하는 AI 신약개발 플랫폼인 ‘자벨린’을 개발했다. 이 플랫폼을 이용하면 새로 개발한 약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알 수 있다.
바이온사이트 역시 공모전을 통해 상금과 함께 글로벌 시장을 볼 수 있는 시각까지 얻었다. 유호진 바이온사이트 대표는 “우리 같은 스타트업이 다케다 같은 글로벌 제약사와 연구할 수 있는 기회는 드물기 때문에 정말 값진 지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며 “다케다 같은 글로벌 제약사들의 관심과 우리 기술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배우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바이온사이트는 다케다와 공동 연구를 통해 자벨린 플랫폼이 항암제 개발에 효과가 있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제약사와 국내외 바이오 기업들과 협력할 수 있었다. 유 대표는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다케다의 연구원들과 연구 내용에 대해 주기적, 직접적으로 논의할 수 있었다”며 “무엇보다도 글로벌 제약사의 시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에 맞게 결과물을 도출하는 능력을 얻었다”고 말했다.
◇국내외에서 오픈 이노베이션 결실 잇따라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 바이오 스타트업과 손을 잡은 것은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하면 10년 이상 걸리는 신약 개발 기간과 비용을 단축하고 성공률을 크게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신약 연구개발(R&D)을 진행해온 기업들이 손을 잡으면 신약을 개발해 시장을 내놓기까지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신약 개발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글로벌 회계법인 딜로이트가 1998~2012년 신약을 개발한 글로벌 제약사 281곳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오픈 이노베이션 모델의 성공률이 34%에 이른다. 반면 기업 내부의 에서 성공률은 11%에 그쳤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대기업 간 교류도 있지만 대기업과 소기업 간 협업도 눈에 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기에 전례 없이 빠르게 개발됐던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역시 대기업-소기업 간 오픈 이노베이션의 결과다. 과거 학계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커털린 커리코(Katalin Kariko) 박사는 독일 바이온텍에 기술 사용 권한을 주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하자 바이온텍은 글로 제약사인 미국 화이자와 함께 mRNA 백신 개발에 나서 1년도 안 돼 성공했다.
국내 제약사 유한양행이 개발한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렉라자’ 역시 대기업과 소기업 간 오픈 이노베이션의 결과다. 유한양행은 2015년 국내 스타트업인 제노스코로부터 후보 물질을 도입하고 비임상시험, 임상시험을 거쳐 개발했다. 2018년 11월에는 글로벌 제약사인 얀센과 12억5500만달러(약 1조7000억원) 규모의 기술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한국에서 새로운 오픈 이노베이션의 결실을 기대하고 있다. 외국계 제약사 연합체인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을 대상으로 오픈 이노베이션 공모전에 참여한 글로벌 제약사는 15곳으로, 그 사례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업계는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세계적인 기술 경쟁력을 갖추면서 오픈 이노베이션이 늘었다고 평가한다. 웬만한 경쟁력 없이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로벌의약산업협회 관계자는 “글로벌 임상시험 같이 신약 개발 관련 경험이 쌓이면서 글로벌 제약사들과의 공동 R&D, 해외 진출 협력 등 성과를 거두고 있다”며 “또한 오픈 이노베이션이 늘며 국내 스타트업들의 글로벌 경쟁력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