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연구 기관은 인류가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를 풀고자 끊임없이 도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 임무 중심 연구 기관이 지향해야 하는 혁신입니다.”

12일 서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만난 미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LNL)의 글렌 폭스<사진> 부국장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은 인류의 난제를 풀었을 때 나온다”며 이렇게 말했다. 미 캘리포니아에 있는 LLNL은 미 에너지부(DOE) 국가핵안보국 산하 연구소로 1952년 냉전 초기 구소련의 핵무기 개발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됐다. 당시 새로운 무기 과학과 기술 및 설계에 집중하던 LLNL은 냉전이 끝난 뒤 수퍼컴퓨터부터 레이저 기술에 이르기까지 국가 안보에 필요한 첨단 기술 개발로 연구 범위를 확장했다. 지금은 4조원에 육박하는 한 해 예산과 8000명이 넘는 연구원이 국가 안보 위협 대응, 바이오 과학, 우주물리학, 재료과학 연구 등에 나서고 있다.

폭스 부국장은 “LLNL은 긴 시간이 필요한 장기 연구에 집중한다”고 했다. 민간 회사와 대학이 비교적 호흡이 짧은 연구로 단시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만큼, 국가 연구 기관인 LLNL은 장기 과제에 집중해 국가 전체의 연구 생태계를 활성화하겠다는 것이다. 테리사 안 랜드 LLNL 특별 프로젝트 고문은 “장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 2~3년 단위의 다양한 단기 과제를 수행하고 평가한다”며 “실패한 연구는 수정하고,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연구는 장기 지속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고 했다. 그는 또 “LLNL이 작년 12월 세계 최초로 점화에 성공한 레이저 핵융합 기술은 사실 60년 전부터 연구해 오던 것”이라고 했다. 인류의 삶을 바꿀 ‘어려운 문제’를 60년간 풀어온 것이다.

인류의 난제를 풀기 위해선 젊은 과학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폭스 부국장은 “젊은 과학자들은 똑같은 문제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LLNL은 젊은 과학자들이 자기 아이디어를 직접 연구에 접목할 수 있게 ‘연구소 주도형 연구 개발(LDRD)’ 제도를 만들었다. 매년 1억7700만달러(약 2300억원)를 투자하는 LDRD를 통해 신진 연구자들이 제안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세상에 드러난다. 허태욱 LLNL 연구원은 “젊은 연구자들이 LDRD를 통해 처음으로 단독 과제를 수행하며 경험을 쌓는다”며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신진 연구자를 실제 연구 분야로 끌어오는 계기가 된다”고 했다.

LLNL 인터넷 홈페이지엔 ‘가장 똑똑한 사람은 대부분 다른 곳에서 일한다’는 말이 적혀 있다. 그만큼 외부의 다양한 사람과 함께 일하는 개방적 혁신을 중요한 수단으로 여긴다. 여러 시각과 아이디어가 있을수록 꽉 막혀 있는 문제의 돌파구가 보이기 때문이다. LLNL은 KIST와도 전고체 배터리, 데이터 과학, 수소, 촉매, 기후과학 분야에서 협업하고 있다. KIST는 올해부터 연구자들을 직접 LLNL로 보내 협력을 확대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