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됐다. 수해를 경고하는 안전 문자가 매일 휴대전화를 울리는 요즘이다. 장마의 위험성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지금보다 더 위험했다. 과거의 장마는 언제나 감염병을 이끌고 왔기 때문이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장마가 오면 정부는 각종 수인성 감염병들을 예방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물 끓여 먹기 운동’을 전개하고 우물을 소독했다. 그런 감염병 중 한반도 주민들을 가장 끈질기게 괴롭힌 것은 ‘장티푸스’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서 여름철 장마 때마다 불어난 물이 식수를 오염시키면서 장티푸스가 유행했다. 사진은 1961년 서울의 한 거리에서 장티푸스 예방접종을 하는 모습. /서울시

장티푸스는 장티푸스균(Salmonella Typhi) 감염에 의한 질환이다. 이 병에 걸리면 대체로 먼저 고열과 오한이 생기고 그다음에 설사가 찾아온다. 모든 환자가 죽음의 문턱까지 가지는 않지만 장출혈과 장천공 같은 합병증이 생기면 치명적이다.

지금은 연간 200~300명에 불과하지만, 1970년대까지 장티푸스 환자는 매년 3000~5000명씩 발생했다. 언제부터 한반도에 장티푸스가 많았는지 알 수 없다. 한국에서는 근대에 들어서야 이 병에 장티푸스라는 이름이 붙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증상이 비슷한 다른 질병들과 함께 온역(溫疫), 온병, 상한(傷寒) 등으로 불렸다. 하지만 저명한 감염학자 전종휘에 따르면 장티푸스라고 불리기 시작한 시점에 이 병은 이미 ‘한국 전염병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장티푸스의 가장 큰 특징은 강한 전파력이다. 이 병은 환자나 보균자의 대소변에 오염된 물 또는 음식의 섭취를 통해 전염된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깨끗한 물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상하수도 시설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우물에서 식수를 구했고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했다. 재래식 화장실은 땅속 구덩이에 대소변을 모아 두다가 한꺼번에 버렸다. 그중 비료로 쓰인 일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강에 버려졌다. 만일 집중호우로 강이 범람하거나 재래식 화장실에 물이 고였다가 넘치면 그 안에 있던 오물과 병균은 삽시간에 근처의 우물을 오염시켰다.

박지영 인제대 의대 교수

한국인이 장티푸스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970~1980년대였다. 항생제가 1950년대 도입되긴 했지만, 그 유행을 크게 줄이지는 못했다. ‘물’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수세식 화장실이 각 가정에 보급됐고 일부 대도시 중심부에만 있던 상수도가 지방 읍면까지 확대됐다. 소수만이 누리던 깨끗한 물을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게 되면서 장티푸스는 빠르게 줄었다. 결국 장티푸스를 막은 것은 누구나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물의 개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