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튬이온 배터리의 아버지’로 불리며 역대 최고령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존 구디너프 텍사스대 교수가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어린 시절 난독증으로 학업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수학에 대한 놀라운 재능을 갈고 닦아 최고의 과학자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특히 자신의 연구에 대한 로열티를 받지 않은 그의 결단은 노트북·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와 전기·하이브리드 자동차 시대를 앞당긴 토대가 됐다.

미 오스틴 텍사스대는 26일(현지 시각) 구디너프 교수가 25일 타계했다고 밝혔다. 제이 하트젤 텍사스대 총장은 “훌륭한 과학자로서 그의 유산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의 발견은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삶을 개선했다”면서 “그는 최첨단 과학 연구의 선구자였고, 혁신적인 에너지 저장 설루션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며 애도했다.

구디너프 교수는 1980년 옥스퍼드대 재직 당시 산화코발트 양극재를 이용하면 이차전지에 고밀도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당시 2볼트에 불과했던 배터리 출력을 4볼트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가 배터리를 발명한 이후 가장 획기적인 도약으로 꼽히는 이 기술은 전기 효율이 높고 가벼운 리튬이온 배터리 개발의 초석이 됐다. 구디너프 교수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9년 영국의 스탠리 휘팅엄, 일본의 요시노 아키라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당시 구디너프 교수의 나이는 97세로 역대 최고령 노벨상 수상자였다. 노벨위원회는 “가벼우면서도 재충전이 가능한 리튬이온 배터리가 개발돼 무선 환경과 화석연료가 없는 사회의 토대를 마련하는 등 인류의 일상을 혁신했다”고 평가했다.

구디너프 교수는 1922년 독일에서 네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옥스퍼드대에서 대학원을 마친 뒤 예일대 종교학 교수로 임용되면서 가족 모두가 미국 코네티컷주에 정착했다. 구디너프 교수의 어린 시절은 그가 2008년 쓴 회고록 ‘은혜의 증인(Witness to Grace)’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부모는 자녀 양육에는 신경 쓰지 않았고, 어린 시절 난독증으로 학업 성적도 좋지 않았다. 그는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난독증을 앓았지만 기계적으로는 읽을 수 있어서 영어와 역사 대신 수학과 언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꾸준한 노력으로 난독증을 극복한 구디너프 교수는 1944년 예일대 수학과를 졸업한 뒤 시카고대에서 물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링컨연구소에서 24년간 재직하며 컴퓨터 램(RAM) 개발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영국 옥스퍼드대로 자리를 옮긴 뒤 1976년부터 리튬이온 배터리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구디너프 교수의 업적은 초기에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옥스퍼드대는 그의 리튬이온 배터리 기술 특허를 거절했고, 결국 영국 원자력 연구 단체에 양도했다. 요시노 아키라 박사가 리튬이온 배터리의 안정성을 높여 상업적으로 사용 가능한 배터리 기술을 완성한 뒤, 1991년이 되어서야 일본 소니가 구디너프 교수의 기술을 결합해 세계 최초로 리튬이온 배터리를 시장에 출시했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이제 전 지구에서 가장 활용 폭이 넓은 제품이 됐다.

구디너프 교수는 연구를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연구 결과로 생긴 로열티를 받지 않았고, 특허도 동료들과 공유했다. 노벨상 등 여러 수상을 통해 받은 상금도 연구 자금과 장학금으로 모두 기부했다. 뉴욕타임스는 “구디너프는 60여 년을 교수 재직 중 받은 봉급만으로 생활했다”고 했다. 90대 나이에도 텍사스대에 출근을 이어왔던 구디너프 교수는 생전 “너무 일찍 은퇴하지 말라”로 조언하며 끝까지 연구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아내 아이린 와이즈먼과는 1951년에 결혼해 60년을 해로한 뒤 2016년 사별했으며 슬하에 자녀는 없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던 그의 연구실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그는 “마치 과학자들이 이론을 논하는 것처럼 열띤 대화를 나누는 사도들의 모습이 그려진 태피스트리를 보면서 장래가 불투명했던 내 인생에 문을 열어준 신성한 힘을 떠올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