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헬스케어 기업 사노피에서 희소 질환 임상 과정에서 수면다원검사를 위해 사용되는 웨어러블 기기. 해당 기기를 사용하면 집에서도 맥박과 혈중 산소 포화도 측정이 가능해 환자들이 병원에 가지 않고도 임상 시험에 참여할 수 있다. /고운호 기자

신약 개발과 환자 치료의 핵심인 임상시험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웨어러블(착용형) 기기와 데이터 전송·분석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병원이나 제약회사를 방문하지 않고도 대규모 임상시험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분산형 임상시험(DCT)으로 불리는 이 시스템을 통해 개발한 신약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분산형 임상시험은 특히 병원 방문이 힘든 희소 질환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일부 희소 질환 임상의 경우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하룻밤을 자며 수면다원검사를 해야 하지만 대부분 거동이 불편해 외출 자체가 위험하다.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 사노피 아벤티스 코리아의 송혜원 총괄은 “희소질환을 앓고 있는 가정에서 임상시험에 참여하고 싶지만 병원에 올 수 없다며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희소질환의 경우 임상시험 참여가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는 만큼 참여 기회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사노피는 현재 희소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치료를 위한 신약을 개발하면서 수면무호흡증 증상을 확인하기 위해 분산형 임상시험을 도입했다. 손목이나 발목에 웨어러블 기기를 착용하고 측정한 맥박과 혈중 산소 포화도 등을 병원에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픽=김의균

◇대세가 된 ‘분산형 임상시험’

분산형 임상시험은 코로나 유행을 거치며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에 따르면 올해 38억달러(약 5조원) 규모인 글로벌 분산형 임상시험 시장은 2026년 126억달러 규모로 팽창할 전망이다. 분산형 임상시험의 가장 큰 장점은 병원 방문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웨어러블 기기나 태블릿을 이용해 환자가 집에서 데이터를 전송하거나 증상을 보고하고 필요한 약은 배송받을 수 있다. 임상시험 참여 문턱을 낮추면서 환자를 더 쉽게 모집하고, 임상시험 속도로 빨라진다. 지난 2020년 모더나가 분산형 임상시험으로 12주 만에 3만여 명의 참여자를 모집해 1년도 안 돼 코로나 백신 개발에 성공한 것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다.

분산형 임상시험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임상시험은 ‘환자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검사를 통한 수치 변화만 체크하던 기존 임상시험 방식을 벗어나 환자가 약을 복용한 뒤 태블릿을 통해 잠을 잘 자는지,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있는지 등 삶의 질이 얼마나 바뀌었는지까지 확인하고 있다. 미 식품의약국(FDA)과 유럽의약품청(EMA)은 신약 개발 과정에서 환자 자기평가를 도입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한국의 한계 보여주는 분산형 임상

한국은 임상시험에서는 세계적 선도 국가지만 유독 분산형 임상시험 분야에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에 따르면 한국의 임상시험 점유율은 세계 5위이며 주요 대학병원이 한곳에 모여 있는 서울은 세계 주요국 중 임상시험을 가장 많이 하는 도시로 꼽힌다. 하지만 비대면 진료는 물론 원격 채혈이나 약 배송 등이 불가능해 분산형 임상시험 확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임상연구동향 매체 ‘클리니컬 트라이얼스 아레나’에 따르면 국가별 분산형 임상시험 비율이 영국과 호주는 12%대, 미국은 8%대지만 한국은 1%대로 하위권이다. 송 총괄은 “방문 채혈 등이 가능한 가정간호 제도가 적극 활용되면 채혈을 위한 대기 시간이나 병원 방문 횟수 등의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기관과 연구자들은 분산형 임상시험 활성화를 위해 임상시험규제(ARICTT) 협의체를 구성해 분산형 임상시험 가이드라인을 논의하고 있다. ARICTT 협의체를 이끌고 있는 오재성 서울대병원 임상약리학과 교수는 “분산형 임상시험에서의 전자 동의와 온라인 모집 등의 원칙을 정하는 과정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올해 안에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