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담배나방 에벌레가 배큘로바이러스에 감염되면 평소와 달리 높은 곳을 찾아가 죽는다./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

영화나 드라마에 좀비가 넘쳐난다. 과학자들도 좀비 팬이다. 자연에는 다른 생물에 감염돼 행동을 조종받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왕담배나방 애벌레(사진)는 땅속에 들어가 번데기가 되지만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 죽는다.

중국 농업대의 류샤오샤 교수 연구진은 “왕담배나방 애벌레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시각 관련 유전자들이 이전보다 더 작동하면서 빛을 따라 높은 곳으로 간다”고 최근 국제 학술지 ‘분자 생태학’에 밝혔다.

류 교수 연구진은 배큘로바이러스에 감염된 애벌레를 연구했다. 이 바이러스는 800종이 넘는 곤충에 감염되는데 주로 나방과 나비류를 공략한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애벌레는 나뭇잎을 타고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 죽는다. 이러면 포식자의 눈에 잘 띄어 바이러스가 더 멀리 퍼질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애벌레의 좀비 행동이 알려진 것은 100년도 넘었지만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전 연구에 따르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애벌레는 빛을 따라가는 주광성(走光性)이 더 강해진다. 류 교수 연구진은 원인을 찾기 위해 바이러스에 감염된 애벌레와 일반 애벌레를 유리 용기에 두고 벽에 그물을 둘렀다. 용기 위에는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을 달았다.

원래 애벌레는 빛을 꺼린다. 특히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번데기가 되기 직전에는 땅이나 나무껍질 사이로 몸을 숨긴다. 실험에서도 일반 애벌레는 그물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번데기가 되기 직전에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반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애벌레는 본능을 잊고 무조건 위로 기어 올라갔다. 바이러스에 많이 감염될수록 더 높이 올라갔다. 연구진은 중력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 조명을 위가 아닌 옆에 설치했다. 이때도 좀비 애벌레는 일반 애벌레보다 4배나 많이 조명 쪽으로 이동했다.

왕담배나방 애벌레는 땅 속에서 번데기가 되지만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시각 관련 옵신과 TRPL 유전자가 더 강하게 작동해 빛을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Molecular Ecology

연구진은 애벌레의 눈을 제거하면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빛을 따라가는 행동이 4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을 확인했다. 눈에 있는 유전자를 분석했더니 빛에 감응하는 옵신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 두 개와 빛을 전기신호로 바꾸는 데 관여하는 세포막 단백질 유전자가 좀비 애벌레에서 이전보다 더 많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이 효소 복합체인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가위로 해당 유전자의 기능을 차단하자 바이러스에 감염된 애벌레가 빛을 따라가는 행동이 절반으로 줄었다. 뉴질랜드 오타고대의 로버트 풀린 교수는 이번 연구에 대해 “상세하고 엄밀한 실험을 통해 애벌레가 위로 올라가는 행동이 중력이나 다른 요인이 아니라 빛에 반응하는 것임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자연에는 나방 애벌레 외에도 높은 곳으로 가도록 조종받는 좀비가 많다. 태국 밀림에 사는 왕개미가 버섯 포자에 감염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나뭇잎을 물고 죽는다. 낮에 버섯이 개미의 머리를 뚫고 나와 포자를 퍼뜨리면, 그 아래를 지나가는 개미들이 다시 좀비가 된다. 곰팡이에 감염된 파리 암컷은 창틀 위처럼 높은 곳을 찾아가 죽는다. 수컷이 좀비 암컷과 짝짓기를 시도하면 온몸에 가득 찬 곰팡이 포자가 공중으로 날린다.

좀비가 된 곤충들. 버섯에 감염된 개미가 대낮에 나뭇잎에 기어올라가 잎맥을 물고 죽으면 밤에 버섯이 개미 머리를 뚫고 나온다(오른쪽). 기생벌의 애벌레는 무당벌레의 몸을 뚫고 나와 고치를 튼다(왼쪽). 무당벌레는 가끔씩 몸을 움직여 천적이 고치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캐나다 몬트리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