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지자연) 포항지질자원연구센터 실험실. 책상 위에 돌덩이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강일모 센터장은 “길에서 흔히 보는 돌이 아니라 오랜 시간 진흙이 굳어 미세한 입자를 가진 점토광물”이라며 “경북 동해안 일대에서 캔 천연 점토광물은 화장품이나 의약품으로 가공된다”라고 말했다. 실험실 바로 옆 건물에는 150평 규모의 점토광물 가공 공장이 있었다. 공장에 들어갈 때는 마치 의약품 생산 시설처럼 흰색 작업복을 입고 머리에도 비닐 모자를 써야 했다.
국내산 점토광물을 먹고 바르는 치료제로 개발하기 위한 연구가 한창이다. 점토광물은 설사나 배탈을 치료하는 지사제·제산제 등으로 쓰인다. 점토 자체가 위산을 중화해주고 장내 유해 물질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과거 동의보감이나 본초강목에도 점토가 약으로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점토광물을 대부분 수입하고 있다. 그마저도 공업용이나 비료 등에 쓰인다. 포항지질자원연구센터는 2016년부터 국내 광물을 화장품이나 의약품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신약 후보 물질 10여 개 개발
점토광물 가공 공장은 원석을 부수고 불순물을 제거해 의약품에 쓸 수 있도록 고운 가루 형태로 가공한다. 의료용으로 불순물이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정제된 물과 공기를 사용한다. 또한 광물의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장 내 온도와 습도도 일정하게 유지된다. 공장은 점토광물을 연간 10t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강 센터장은 “점토광물을 활용해 흡수가 더 잘되는 코로나 치료제를 만드는 기술도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경북 포항 동해안 일대에는 천연 점토광물이 다량 묻혀 있다. 공룡이 사라지고 난 뒤인 신생대 제3기(약 2200만~180만년 전)에 분출한 화산재가 물과 반응해서 만들어진 자원이다. 지질자원연구원에 따르면 경북 동해안에 매장된 점토자원은 제올라이트 3000만t, 벤토나이트 470만t, 산성백토 660만t, 규조토 340만t으로 추정된다. 경북 일대의 점토 자원은 앞으로 수백년간 활용할 수 있는 양이라고 연구원은 밝혔다.
특히 연구원은 ‘벤토나이트’라는 광물에 집중하고 있다. 단순히 지사제·제산제가 아니라 약물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용도로 개발하고 있다. 벤토나이트는 판 모양의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판 사이에 약물을 붙여 인체에 전달하면 점토가 위나 장에 달라붙고 약물을 서서히 방출한다. 덕분에 오랫동안 약효를 유지할 수 있다. 강 센터장은 “점토는 입자가 작아 표면적을 합치면 엄청나다”며 “1g으로 테니스장 1개에 해당하는 약 700㎡를 덮을 수 있어 약물 전달체로 개발될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조금씩 성과도 나오고 있다. 동물실험에서 약물과 점토 복합체의 체내 흡수율이 기존 약물만 사용하는 것보다 크게 개선된 것으로 확인됐다. 소화기관 표면에 잘 달라붙어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 연구원은 점토광물을 이용해 현재 신약 후보 물질 10여 개를 개발하고 있다. 코로나 치료제도 있다. 연구진은 “점토를 이용해서 흡수율을 높인 경구용 치료제 개발에 큰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먹는 치료제뿐 아니라 코에 뿌리는 스프레이 예방제도 개발하고 있다.
◇1t당 수억원 하는 고부가가치 자원
점토자원은 화장품으로도 인기가 높다. 해외에서 알래스카나 사해 머드를 활용한 화장품들이 나와 있다. 클렌징 제품이나 자외선 차단제 등이다. 미세 입자가 모공 속 노폐물을 잘 제거하고, 피부를 잘 덮기 때문이다. 앞으로 동해안 점토 화장품도 나올 수 있다.
연구원은 이르면 2~3년 내 의약품·화장품을 상용화하겠다고 밝혔다. 포항지질자원연구센터에 연구용 시설 80평을 구축했고, 150평 시설에는 기업이 입주해 있다. 현재 더 큰 규모의 300평 시설에도 기업을 유치하겠다고 밝혔다.
점토광물을 공업용이 아닌 의료용으로 개발하는 건 고부가가치 때문이다. 1t당 5만원에 불과한 원석이 가공·정제 과정을 거치면 1t당 1500만~3000만원의 가치로 뛴다. 제대로 된 의약품만 개발되면 1t당 수억까지 올라간다.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이 천연 점토광물을 의약품·화장품으로 연구⋅개발하는 이유다. 강 센터장은 “점토광물을 활용할 방안은 무궁무진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