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백형선

로봇이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과학자들이 인간의 뇌를 모방한 반도체칩을 개발하고 있다. 신경의 형태를 가진 ‘뉴로모픽(neuromorphic) 칩’ 기술이다. 최근 자율주행, 사물인터넷(IoT), 로봇이 발전하면서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뉴로모픽 칩의 능력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인간의 뇌를 모방하면 칩이 사람처럼 냄새를 구별하고 민감한 촉각을 가진 로봇도 개발할 수 있다.

◇사람처럼 10가지 냄새 구별하는 칩

인간의 뇌는 수많은 신경세포(뉴런)로 이뤄져 있으며, 이들이 서로 연결된 시냅스를 통해 신호를 전달한다. 인간의 뇌는 약 1000억개의 뉴런과 100조개의 시냅스로 구성된다. 과학자들은 이런 구조를 모방해 기존 컴퓨터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최양규·최성율 교수팀은 “인간의 뇌를 모방한 고집적 뉴로모픽 반도체를 개발했다”고 지난 5일 밝혔다.

인간의 뇌처럼 많은 뉴런과 시냅스를 구현하려면 큰 면적이 필요한데, 연구진은 기존보다 집적도를 약 3500배 이상 높였다. 한준규 박사과정 연구원은 “뉴로모픽 반도체의 집적도를 개선했고 이는 뉴로모픽 하드웨어의 상용화를 한 단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적인 컴퓨터는 연산과 단기 기억, 장기 기억을 모두 따로 수행했다. 중앙처리장치(CPU), 주기억장치, 입출력장치 3단계로 구성된 이른바 폰 노이만 방식이다. 직렬로 연결된 구조여서 대량의 정보를 처리하면 속도가 느리고 막대한 전력이 소모된다.

하지만 모든 방향으로 병렬 연결된 인간의 신경망 구조를 활용하면 빠르면서도 전력 소모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뉴로모픽칩을 사용하면 에너지 소비가 20와트(W)에 불과하다.

뉴로모픽 칩에서는 코어의 소자가 뉴런 역할을 하고 코어 속 메모리는 시냅스 역할을 한다. 뇌에서 뉴런들의 연관성이 높으면 시냅스를 통해 연결 강도가 세진다. 마찬가지로 코어와 코어의 연관성이 높으면, 저항이 낮아져 흐르는 전류가 많아진다. 전류가 많이 흐르면 저장된 데이터도 늘어난다.

뉴로모픽 칩은 인텔이 선두 주자다. 인텔이 개발한 로이히(Loihi) 칩은 기존 중앙처리장치(CPU)보다 검색·연산 처리 능력이 1000배 이상 좋고 속도도 100배 이상 빠르다. 칩에서 13만개의 뉴런이 각각 다른 뉴런 수천개와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인텔은 지난해 곤충 수준의 로이히 칩 768개로 생쥐에 맞먹는 후각을 구현했다. 로이히 칩들은 아세톤과 암모니아, 메탄 등 10가지 냄새가 뒤섞여 있어도 생쥐처럼 특정 냄새를 감지할 수 있었다.

◇사람보다 1000배 빨리 촉각 감지

뉴로모픽 기술의 활용은 무궁무진하다. 대량의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는 인공지능(AI)뿐 아니라 자율 주행, 로봇 등에 쓰일 수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어린이 재활 전문 알렌병원은 뉴로모픽 칩을 적용한 로봇팔을 휠체어에 부착했다. 1억개의 인공신경망을 가진 로봇팔은 환자의 행동을 인식하고 분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비 환자가 물컵으로 물을 마시려고 하면 로봇팔이 환자의 움직임을 분석해 입으로 부드럽게 가져다주는 식이다. 병원 측은 “간병인의 시간을 최대 41%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교(NUS) 연구진은 시각과 촉각 기능을 로봇에 적용했다. 인간의 촉각은 매우 민감해 표면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연구진이 개발한 인공 피부는 인간의 감각 신경계보다 1000배 이상 빨리 촉각을 감지한다. 또한 눈이 한 번 깜빡이는 것보다 10배 이상 빨리 물체의 모양과, 질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은 로봇이 물체의 성질을 인식해 미끄러지지 않게 적당한 압력을 잡는 데 쓰일 수 있다.

실제로 연구진은 다양한 양의 액체를 담은 용기를 구별해 쥐는 실험을 진행했고, 로봇은 실수 없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뉴로모픽 칩은 기존 시스템보다 감각 데이터를 21% 빠르게 처리하고 45배 낮은 전력을 사용했다. 연구진은 산업뿐 아니라 수술 등에도 뉴로모픽 칩이 적용된 로봇이 활용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