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박호석(43) 화학공학·고분자공학부 교수 연구실 한쪽 벽에는 액자 20여개가 걸려 있다. ‘어드밴스트 에너지 머티리얼’(Advanced Energy Materials), 줄(Joule), ACS 나노(Nano) 등 일반인에겐 낯설지만 에너지·소재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가진 국제학술지 표지를 넣은 액자다. 박 교수는 “모두 우리 연구진이 쓴 에너지 저장 장치와 관련된 논문이 (학술지) 표지에 실린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에너지 저장 장치를 연구한다. 영화 어벤져스의 아이언맨이 입는 슈트를 구동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저장하는 장치를 연구한다고 보면 된다. 전자기기가 보편화하면서 에너지 저장 장치는 필수다. 얼마나 작고 유연하고 안전하게 만들면서도 얼마나 많은 전기를 담을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크게 배터리와 수퍼 커패시터(Super capacitor)로 나눌 수 있는데 배터리는 저장 용량이 커 오래가지만, 출력이 작다. 반면 수퍼 커패시터는 출력이 강하고 급속 충전이 가능하지만, 용량이 작다. 배터리는 마라톤 선수, 수퍼 커패시터는 단거리 육상 선수인 셈이다. 이 때문에 현재 전기 자동차에는 두 장치를 모두 사용해 서로 단점을 보완하고 있다.

박호석 성균관대 교수가 지난 5일 연구실에서 배터리와 그 안에 들어가는 소재를 들어 보이고 있다. 박 교수는 신소재를 이용해 빠르면서도 오래가는 고성능 에너지 저장 장치를 개발 중이다. /고운호 기자

◇빠르면서도 오래가는 에너지 저장 장치

박 교수는 마라토너와 단거리 선수의 장점만 합쳐 빨리 오래 뛰는 ‘괴물 선수’를 개발 중이다. 그는 나노 신소재인 ‘포스포린’을 에너지 저장 장치에 적용했다. 포스포린은 에너지 저장 장치에 많이 쓰이는 흑연보다 전기를 더 많이 저장할 수 있다. 하지만 전기 전도도가 낮고 부피 팽창이 커 장치를 손상할 수 있어 에너지 저장 장치에 적합하지 않았다. 충·방전 때 안전성도 떨어졌다.

박 교수는 포스포린 표면 위의 원자를 정밀하게 제어해 이런 문제점을 해결했다. 마치 피자 위의 토핑을 바꿔 다른 맛을 내듯이 원자를 제어해 새로운 성질을 만들어낸 것이다. 포스포린이 에너지 저장 장치에 쓰일 수 있음을 규명한 것은 박 교수가 세계 최초다. 새로 개발한 소재는 기존에 많이 쓰이는 소재보다 4배 정도 용량이 컸다. 박 교수는 “포스포린을 이용한 에너지 저장 장치는 고효율·고출력·고안정성의 특성을 보였다”며 “전기 자동차 등에 응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관련 연구는 지난해 2월 국제학술지 ‘네이처 머티리얼스’에 실렸다.

박 교수는 또 웨어러블(입을 수 있는) 기기에 적용할 수 있는 에너지 저장 장치도 연구 중이다. 전자 기기를 몸에 부착하려면 유연하면서도 크기가 작아야 하고 고온·고압 등 외부에서 가해지는 에너지에도 잘 견뎌야 한다. 박 교수는 여기에서도 나노 신소재인 ‘맥신’을 이용해 부피를 1000분의 1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박 교수는 “고온·고압 등 다양한 극한 환경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저장 장치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10~20년 뒤 대비한 원천 기술 연구

박 교수는 경북대를 졸업한 뒤 카이스트 대학원에 진학했다. 연구가 적성에 맞는다는 걸 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짜여 있는 대로 살았지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연구를 접한 대학원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에너지 저장 장치가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노벨화학상은 리튬 이온 배터리를 개발한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스마트폰 사회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공로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새 시대와 시장을 열려면 새로운 전지가 필요하다”며 “아직은 아무도 미래를 모르지만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할 에너지 저장 장치를 개발하면 우리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과학자들은 당장은 못 쓰이더라도 10~20년 뒤를 위한 원천 기술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상용화를 위한 연구나 유행을 좇기보단 새로운 연구 분야에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획기적인 연구를 하려면 몇십년간 한 우물을 파야 하는데 한국 현실상 꾸준히 하기는 쉽지 않다”며 “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연구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자기가 잘하는 걸 꾸준히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고 사회도 믿고 기다려줬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