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주택 공급 대책을 발표할 때마다 ‘공공 주도’ 원칙과 청년·신혼부부를 위한 임대주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장 상황은 정부 의지와 180도 다른 모습이다. 이미 사업 승인을 마치고도 토지 보상이 지체되며 첫 삽조차 뜨지 못한 공공 임대주택이 전국적으로 10만 가구가 넘고, 완공한 임대주택 역시 너무 좁거나 입지가 외곽이라는 이유로 빈집으로 방치되는 사례가 수도권에만 1만 가구가 넘는다. 공공이 주도해 속도도 내지 못하고, 실수요자들에게 외면까지 받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숫자 채우기에서 벗어나 수요자들이 원하는 주택을 공급할 수 있도록 정책의 체질을 바꾸고, 행정 절차도 간소화해 사업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승인 후 미착공 임대주택 10만6000가구
9일 국민의힘 이종욱 의원실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건설형 공공 임대주택 중 사업 승인을 받고도 착공하지 못한 물량은 총 10만5938가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설형 공공 임대주택은 LH가 토지를 직접 확보하고 아파트를 건설해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게 5년 이상 장기 임대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미착공 물량이 2년 전(2만8432가구)의 4배 가까이로 늘어난 상황이다. 승인 후 3년이 지나도록 첫 삽도 못 뜬 ‘악성 미착공’ 물량은 8498가구로 전체의 8%를 차지했다.
임대주택 공급이 지연되는 가장 큰 원인은 토지 보상이다. 전체 미착공 사유 중 ‘토지 보상’이 7만7120가구로 72.8%를 차지했다. 지난해 LH를 대상으로 제기된 소송 512건 중 346건이 토지 보상금 관련 건일 정도로 토지 보상 관련 갈등이 많다. 대표적으로 주택 6만7000가구가 들어설 예정인 광명시흥지구는 지구 지정 후 4년 만인 올해 말에야 협의를 마치고 보상금 지급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밖에 인프라 등 조성 공사로 인한 지연이 24.5%, 관계 기관과의 협의로 인한 지연이 1.9% 등이었다.
공공 임대주택의 문제는 느린 속도만이 아니다. 당장 수요자가 입주해 거주할 수 있는 완공 임대주택조차 장기간 빈집으로 방치되는 사례가 많다. 시장의 수요와 동떨어진 입지 및 설계 탓이다.
지난 1월 기준 수도권 건설형 공공 임대주택 중 6개월 이상 비어 있는 집은 1만2438가구로 집계됐다. 흔히 공실 임대주택은 빌라나 오피스텔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체 공실 임대주택 중 절대 다수인 1만447가구가 아파트인 건설형 임대주택이었다. 이는 도심에서 너무 떨어진 입지 때문으로 해석된다. 실제 경기 양주시 옥정지구의 일부 공공 임대주택 단지 공실률은 17%에 달하고, 파주시 운정지구 일부 단지도 16%가 비어 있다.
좁은 면적 위주의 평형 구성도 공공 임대주택의 고질적 문제점으로 꼽힌다. 면적별 공실률에서 그 한계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전용면적 31㎡(약 9평) 미만 초소형 평형이 5745가구로 전체 빈집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반면 61㎡ 이상 대형 평형 빈집은 872가구에 불과했다. 가구 구성이 다양해지고 삶의 질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졌지만, 공급 숫자를 늘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작은 집만 공급하면서 빚어진 수급 불일치다.
◇공공임대 정책 체질 개선돼야
전문가들은 정부의 ‘공공 주도 공급 확대’ 정책이 효과를 내려면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공급 속도를 높이기 위해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고, 평형 역시 실수요자가 선호하는 중대형 평형 비율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비어 있는 초소형 주택은 리모델링 등을 통해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유선종 건국대 교수는 “인허가와 토지 보상을 동시에 진행하는 등 절차를 간소화해 행정적 소요 시간을 줄이는 한편, 규제 완화를 통해 민간 주택 공급도 정상화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