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의 랜드마크 대단지 남산타운아파트(2002년 준공)는 지난 2018년 서울시의 ‘리모델링 시범 단지’로 선정돼 사업 추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첫 단추인 조합 설립조차 못 하고 있다. 임대주택 때문이다. 전체 세대의 약 40%에 이르는 서울주택도시공사(SH) 소유 임대주택을 사업에서 배제하려다 보니, ‘소유주 3분의 2 이상 동의’라는 조합 설립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이다. 빠른 리모델링을 원하는 분양 세대와 ‘갈 데가 없어진다’는 임대 세대의 이해가 충돌하는 것이다.
분양주택과 임대주택이 섞여 있는 ‘혼합 단지’ 재건축·리모델링 사업이 제도적 허점 때문에 줄줄이 좌초 위기에 처했다. 리모델링 또는 재건축 대상인 서울 지역 혼합 단지는 현재 3만 가구가 넘는다. 1년 치 서울 전체 아파트 입주 물량과 맞먹는 규모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규모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서울 주택 공급의 활로가 될 수 있는 이들 단지 재정비 사업에 제동이 걸리면서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멈춰 선 혼합 단지 정비 사업
현재 SH가 관리 중인 서울 시내 혼합 단지는 468곳이다. 이 가운데 준공 20년을 넘겨 리모델링이 가능하거나 재건축 연한(30년)을 향해 가고 있는 단지는 22곳, 3만938가구에 달한다. 이들 상당수가 정비 사업을 시도하고 있지만, 단지 내 임대주택 문제에 가로막혀 난항을 겪고 있다.
핵심 걸림돌은 ‘주택법상 동의율’이다. 조합을 설립하려면 전체 소유자의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정면충돌한다. 분양 세대(집주인)는 리모델링을 통해 자산 가치를 높이고 싶어 한다. 반면 임대 아파트의 실소유주 SH 등은 세입자들의 반발을 의식해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임대 아파트 입주자들은 공사 기간 이사를 해야 하고 조합원처럼 재산 증식도 기대할 수 없으니 동의할 이유가 없다. 남산타운처럼 따로따로 가려고 해도 법이 ‘같이 동의해야 한다’고 강제하고 있어 사업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선 기형적인 방법까지 동원되고 있다. 강남구 수서1단지는 필지 분할을 통해 분양동과 임대동을 별개의 아파트로 쪼개서 분양동만 재건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임대주택 주민들의 동의가 필요 없지만 사업 규모가 쪼그라들어 조합원 분담금이 급증할 수 있다. 이 아파트는 전체 2934가구 중 75.5%(2214가구)가 임대주택이다.
◇법 개정안은 7개월째 계류 중
혼합 단지 정비 사업 문제 해결을 위한 법안이 발의됐지만 휴면 상태다.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임대동 소유자의 동의 없이 리모델링 조합 설립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의 주택법 개정안을 지난 4월 발의했다. 하지만 ‘임대주택 입주민의 주거권을 과도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신중론에 막혀 법안심사소위 문턱도 넘지 못하고 있다.
정부도 뒤늦게나마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은 이달 중 ‘혼합 단지 재건축 사업화 모델 검토’ 연구 용역을 발주할 계획이다. 실제 제도 개선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임대주택도 결국엔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이 필요하므로 통합 개발을 유도할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고준석 연세대 상남경영대학원 특임교수는 “용적률을 높여 주택 수를 늘리고, 분양 수익으로 임차인의 이주비나 보상금을 충당할 수 있게 하는 방식도 검토할 만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