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부동산 수요 억제 정책에 따라 정비사업장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6·27 대책과 10·15 대책을 통해 재건축·재개발 조합원의 이주비 대출 한도를 6억원으로 축소한 데 더해 규제지역·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을 통해 조합원 지위 양도까지 제한했기 때문이다.

서울 용산구 보광동 한남2구역 재개발사업 예상 조감도. /서울시 정비사업 정보몽땅 제공

이런 규제에도 서울 용산 등 사업성이 좋은 사업장은 추가 이주비를 주선하려는 금융기관이 줄을 서며 사업에 속도가 붙고 있다. 반면 노원 등 비(非)한강벨트에 지역에 위치한 조합 설립 전 단계의 사업장들은 규제 이후 사업 추진 동력이 줄어들고 있다.

4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한남2구역 시공사인 대우건설이 약 5820억원 규모 추가사업비(추가이주비) 입찰을 마감한 결과 총 7곳의 금융기관이 참여했다. 미래에셋증권과 KB증권, BNK투자증권, 신영증권 컨소시엄, 아이엠증권, DB증권, 리딩투자증권 등이다.

통상 이주비 대출은 주택도시보증공사의 보증을 받아 은행에서 조달한다. 이주비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해 추가 이주비가 필요한데, 이는 건설사 주관으로 증권사에서 주선해 조달한다.

현재 정부의 6·27 대책으로 세대당 이주비 대출한도가 6억원으로 제한되면서 은행에서 취급할 수 있는 이주비 대출 규모가 줄어든 상태다.

한남2구역 역시 이주비 대출이 8000억원에서 4000억원으로 축소됐다. 이 때문에 조합이 필요한 추가 이주비 대출 규모가 5820억원으로 약 45% 더 커졌다. 이에 대우건설은 한남2구역의 추가 이주비 대출을 위한 신용공여를 제공한다.

앞서 지난 9월 기본이주비와 사업비 입찰에는 17개 금융사가 참여했다. 우리은행(4000억원)과 KB증권(8025억원)이 각각 기본이주비, 사업비 대출기관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같은 서울 안에서도 노원, 도봉 등 비(非)강남·용산권 정비사업장들은 조합 설립 지연과 분담금 증가, 이주비 대출 규제 강화 등으로 사업이 지지부진해지고 있다.

10·15 대책으로 서울 전역은 경기 과천·광명 등 12개 지역과 조정대상지역·투기과열지구·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매매 시 2년의 실거주 의무가 부여된다. 재건축은 조합 설립 후, 재개발은 관리처분인가 후 조합원 지위 양도가 제한된다.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달 28일 서울 성동구 성수1구역 주택재건축정비사업 현장을 방문해 정원오 성동구청장의 설명을 들으며 정비사업구역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시에 따르면 조합원 지위 양도 제한이 적용되는 사업장은 약 210곳, 16만여가구에 달한다. 조합 설립 전인 정비구역 지정, 조합 설립 추진위원회 단계 재건축·재개발 사업장도 총 65곳, 8만1000여가구다.

서울 노원구 중계주공4단지는 내년 초 재건축 추진준비위원회 구성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규제 발표 후 내부에서 사업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같은 노원구 상계주공5단지에서도 이주 절차를 앞두고 분담금 부담이 커지면서 조합원들 사이에 자금 조달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번지고 있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요즘 6억원으로 서울 아파트 전셋값을 충당하기란 쉽지 않다”며 “이주비 대출이 6억원 한도로 막히면 서울에서도 강남 압구정동, 용산 한남동, 성동 성수동 등 한강벨트 입지를 갖추지 못한 사업장은 정비사업을 더 이상 추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강남권 한강벨트 정비사업지는 삼성물산, 현대건설, DL이앤씨 등 신용등급 AA- 이상의 건설사가 신용공여를 통해 추가 이주비 대출을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주가 수월한 편”이라면서도 “비강남권은 아파트 매매가격이 강남권에 비해 낮아 공사비·금융비로 늘어난 분담금에 이주비 대출길까지 막히면 현실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주비 한도를 종전자산 평가액과 비례하도록 설정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6억원 한도의 일률적인 이주비 대출 제한보다는 담보인정비율(LTV) 40~50% 수준으로 설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지적이다.

신보연 세종대학교 산업대학원 부동산AI융합학과 교수는 “정부는 종전자산 평가액과 무관하게 모든 조합원에게 동일한 대출 한도(6억원)를 적용해 기본 이주비만으로는 유사한 규모의 임차주택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며 “신용도가 높은 대형 시공사의 추가 이주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고착화하면서 대형·중소 건설사 간 양극화도 심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현재 가계대출로 분류된 이주비 대출을 일반 주택담보대출과 다르게 별도 정비사업을 위한 시설자금으로 범주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신 교수는 “추가 이주비 대출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금리가 일반 주택담보대출보다 연 2%포인트(P) 가량 높아 조합원의 실질적 부담이 늘어나는 구조”라며 “주택도시기금 등 공공 금융을 통한 이주비 지원 체계를 마련해 시공사의 신용도와 무관하게 조합원이 공정한 조건으로 이주비를 조달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