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에서 아파트를 세 주고 있는 A씨는 최근 세입자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임대차분쟁조정위 문을 두드렸다가 좌절했다. A씨는 세입자에게 임대료를 계약 갱신 법정 한도(5%)만큼 올리자고 요청했지만 “한 푼도 올려줄 수 없다”며 거절당했다. 결국 임대료 조정을 위해 조정 신청을 넣었지만 세입자가 응하지 않아 시작조차 못했다. 조정위는 “세입자가 응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했다.
A씨는 “새 임대차법 시행 당시 정부는 임대차분쟁조정위에서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말했지만 막상 문제가 생기니 아무런 도움이 안 되더라”며 “소송하려고 해도 비용이 많이 들고 기간도 최소 6개월 이상 걸린다고 해 고민”이라고 했다.
지난해 7월 말 새 임대차법 시행 이후 집주인과 세입자 갈등이 큰 폭으로 증가했지만, 소송 없이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수단인 조정 제도에 대해 현장에서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대차법 이후 법을 준수하는 수준의 임대료 인상 요구에도 세입자가 이를 거부하거나, 집주인이 실거주를 이유로 세입자를 내보내고 실제 거주하지 않는 등 분쟁 사례는 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조정 제도는 강제성이 없어 쌍방이 동의하지 않으면 제대로 시작조차 할 수 없다.
◇10건 중 4건은 제대로 시작도 못해
4일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월평균 임대차법 관련 상담 건수는 법 시행 전 7개월간 5298건에서 법 시행 후 지난달까지 7293건으로 37.7% 증가했다. 조정 신청도 월 117건에서 140건으로 20%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실제 조정을 신청해도 당사자들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받기는 쉽지 않다. 올해 조정위에서는 7월까지 총 863건의 조정 처리가 끝났는데, 이 중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 조정안을 받아들여 조정이 성립된 사례는 140건(16%)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중간에 신청자가 조정 신청 자체를 취하한 경우(278건·32%), 한쪽이 최종 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조정불성립’(55건·6%), 조정 자체가 이뤄지지 않은 ‘각하’(387건·45%) 등이었다. 각하의 상당수는 한쪽이 출석에 응하지 않는 등 조정 절차 자체를 거부한 경우다. 조정 신청 10건 중 4건 이상이 제대로 된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끝났다는 의미다.
이런 결과는 강제력이 없는 조정제도의 근본적인 한계 탓이다. 조정 절차는 한쪽이 신청하면 자동으로 시작되긴 하지만, 집주인이나 세입자 중 한쪽이 조정에 응하지 않으면 조정 절차가 더는 진행되지 않는다. 또 양쪽 모두 조정에 참여해 최종 조정안이 나오더라도 한쪽에서 이를 거절할 수 있다.
지난해 국회에서 임대차분쟁조정위의 실효성을 강화하는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계류 상태다. 서울임대차분쟁조정위의 최재석 사무국장(변호사)은 “조정안 자체를 강제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조정 절차에는 응하게 해서 조정안을 만들고 양측이 그걸 바탕으로 판단하게는 해줘야 한다”고 했다.
◇조정 사례 공유도 안 돼 ‘답답’
전문가들은 당장 법안 개정이 어렵다면 조정 사례를 공유하는 정도의 조치라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임대차 분쟁이 큰 틀에선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에 조정 사례들이 공개되면 집주인과 세입자가 이를 바탕으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임대차법 시행 이후 현재까지 한 차례 해설집을 발간한 것 외에는 1년째 후속 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실제로 온라인 부동산 커뮤니티에는 “국토부에 문의를 넣었는데 두루뭉술한 답변만 준다” 등 불만이 넘쳐나고 있다. 이와 관련, 국토부 관계자는 “올해 안에 임대차 사례집 발간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영 명지대 교수는 “새 임대차법은 계약갱신권을 주면서도 집주인이 실거주를 이유로 거절할 수 있게 하는 등 애초에 분쟁 소지가 많을 수밖에 없는 법”이라며 “이제 와 법을 수정할 수 없다면 조정위 권한을 강화하거나 충분한 사례를 제공하는 등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