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8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최근의 전세대란을 해결할 방안으로 ‘질 좋은 중형 공공임대주택’을 언급한 바로 다음 날, 여당에서 세부 계획안을 내놨다. 소형 임대주택만 지을 수 있던 재건축 단지에 30평대 공공임대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발의한 것이다. 단, 공기업이 사업에 참여하고 개발 이익의 상당 부분을 공공이 환수하는 ‘공공 재건축’에 한해서다.

하지만 중형 공공임대주택이 원활하게 공급될지는 미지수다. 공공 재건축의 흥행이 전제돼야 하는데 시장 반응은 썰렁하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시가 재건축 조합·추진위원회를 대상으로 신청받은 사전 컨설팅에 참여한 아파트가 15곳밖에 되지 않는 데다 그마저도 주택 공급 효과가 미미한 소규모 단지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대어로 꼽히는 강남권 아파트들은 조합원들이 공공 재건축에 반발하고 있어 무산될 상황이다. “애초에 민간 재건축은 규제하면서 임대주택은 늘리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29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단지 내에 '공공 재건축 결사반대' 현수막이 붙어 있다. 은마아파트 재건축추진위원회는 당초 공공 재건축 참여를 검토하는 차원에서 사전 컨설팅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잠정 중단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30평대 공공임대, 공공 재건축부터 적용

29일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공 재건축에 들어서는 공공주택의 전용면적 기준을 ’60㎡ 이하'에서 ’85㎡ 이하'로 확대하는 내용의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공공 재건축은 현행 250%인 서울의 아파트 용적률 상한선을 300~500%로 높이는 대신, 추가로 건설되는 아파트의 50~70%를 공공분양 및 임대주택으로 기부채납 받는 구조다. 이 공공주택을 활용해 중산층을 위한 중형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한다는 게 법 개정안의 요지다. 전용면적 85㎡는 4인 가구가 가장 많이 찾는 34평형이다.

기존에도 서울 재건축 아파트는 용적률 인센티브(50%)를 받는 대가로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해 왔다. 정부는 임대주택 수를 늘리기 위해 소형주택만 짓도록 했다. 하지만 지난 8월 문 대통령이 “공공임대를 중산층까지 포함해 누구나 살고 싶은 ‘질 좋은 평생 주택’으로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중형 공공임대 도입 논의가 본격화됐다.

◇강남권 공공 재건축, 시작부터 삐걱

정부는 지난 8월 ‘8·4 대책’을 발표하며 “서울에서 공공 재건축을 통해 5만 가구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1만 가구 이상의 공공임대주택이 공급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양질의 공공임대주택이 나오려면 강남 등 입지 좋은 지역의 대규모 단지들이 공공 재건축에 참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정부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공공 재건축 사전 컨설팅을 신청한 아파트 15곳 중 1000가구 이상 대단지는 3곳뿐이다. 이 중 강남권 대단지가 두 곳인데, 이들 모두 주민 반발로 사전 컨설팅에 차질을 빚고 있다.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재건축추진위원회는 최근 주민 요구에 따라 사전 컨설팅을 잠정 중단했다. 이정돈 추진위원장은 “애초에 사업성이 어떤지 따져보는 차원에서 신청한 것”이라며 “주민 의견을 좀 더 수렴한 후 사전 컨설팅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복문 잠실주공5단지 조합장은 최근 조합원들에게 “컨설팅 결과가 아무리 좋게 나오더라도 공공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우편물을 발송했다. 그는 “초과이익 환수제, 분양가 상한제 등 재건축 관련 기존 규제들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공공 재건축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공공 재건축을 하면 분양 주택 수가 늘어나고 인·허가 절차가 간소화되기 때문에 조합의 사업 수익성이 높아진다. 반면 임대주택이 늘어나고 동(棟) 간 간격이 좁아져 단지 내부가 빽빽해지는 단점이 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조합이 재건축을 하려면 정부나 서울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신청했다가 조합원 반발을 명분 삼아 한발 물러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