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광고 대행사 A는 한국거래소 상장 공시 시스템(KIND)에 두 줄짜리 기업 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했다. ‘핵심 사업 경쟁력 강화. 지속 성장을 위한 전략적 투자’다. A뿐이 아니다. 반도체 부품 제조사 B는 기업 가치를 높일 계획으로 ‘사업 부문별 전략 수립. 가격, 기술 경쟁력 강화 및 고정비 절감을 통한 이익 극대화 노력. 영업이익 확대를 통한 배당 재원 확보 노력’을 적어냈다. 기업의 사업 목표와 주주 환원 확대 계획을 밝히는 ‘밸류업 공시’에 세부 내용이나 구체적인 숫자 없이, 업종과도 상관없는 원론적인 얘기만 늘어놓은 셈이다.

최근 KIND에는 이처럼 밸류업을 내세운 ‘맹탕 공시’가 우후죽순 올라오는 추세다. 상장사들 사이에서 최근 통과된 ‘조세특례제한법’의 세제 혜택을 노리고, 내용이 부실한 공시도 ‘일단 올리고 보자’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다. 여기에 오는 7월부터 정부가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저PBR’ 기업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밝히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업들의 부실 공시가 몰렸다는 분석이다. PBR은 주가를 주당순자산(BPS)으로 나눈 비율로, 기업의 순자산 대비 주가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다.

◇우후죽순 올라오는 ‘맹탕 공시’

1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3월 한 달 동안 409건의 밸류업 공시가 올라왔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PBR이 1 미만인 ‘저PBR’ 기업인 데다 공시 내용도 두세 줄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조세특례제한법 제104조의27에 따르면, 고배당 기업으로 인정받으면 주주가 받는 현금 배당소득에 대해 기존 종합소득세(최고 세율 49.5%) 대신 분리과세를 적용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세율은 연간 배당소득 2000만원 이하 14%, 2000만~3억원 20%, 3억~50억원 25%, 50억원 초과 30% 등으로 낮아진다. 세금 부담이 기존에 비해 확 낮아지는 셈이다.

이에 고배당 기업들이 세제 혜택을 얻고자 앞다퉈 밸류업 공시를 올리고 있다는 평가다. 고배당 기업은 직전 사업연도 배당 성향이 40% 이상이거나, 배당 성향이 25% 이상이면서 전년도 대비 배당금을 10% 이상 늘린 경우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저PBR’ 명단 탈피 목적도

정부의 ‘저PBR’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않기 위한 목적도 있다. 앞서 금융위는 7월부터 업종별 PBR 하위 20% 또는 PBR 1 미만 기업을 ‘저PBR 명단’으로 공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금융위가 이들 가운데 기업가치 제고 공시를 한 기업은 일정 기간 명단에서 제외하기도 하면서 상장사들이 저PBR 꼬리표를 떼고자 단 몇 줄짜리 공시라도 일단 올린 것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선 실제로 제대로 된 계획이 없더라도 일단 올리는 게 우월 전략”이라며 “하지만 교과서적인 문장들만 늘어놓는 계획이 기업 가치 제고에는 의미가 없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실제로 저PBR 기업의 공시를 보면 ‘경쟁력 강화’ ‘자본 효율성 제고’ ‘주주 환원 방안 모색’과 같은 원론적인 문구가 대부분이었다. 밸류업에 대한 의지보단 세제 혜택을 노리거나 저PBR 기업이란 오명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대기업도 예외 아냐

대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3일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논평에서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의 밸류업 계획에 최하위 점수인 ‘F학점’을 매겼다. 거버넌스포럼은 “삼성전자 밸류업은 약 20줄, 삼성생명은 10줄에 불과했다”며 “아무리 ‘약식’ 공시라고 하지만 삼성전자의 세계적 위상과 지난 2년간 밸류업 계획 발표를 기다린 주주들의 염원에 비하면 너무 부실했다”고 했다.

한국거래소는 첫해인 만큼 약식 공시를 허용했다는 입장이다. 한국거래소 측은 “고배당 세제 특례 첫해라 약식 공시를 허용해 공시 부담을 줄였다”며 “내년부터는 배당·자본 효율성 등 상세 계획을 필수로 요구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페널티를 통해 밸류업 공시 참여를 유도한 일본은 형식적인 수준에 그친 사례가 많았다”며 “국내 금융지주사들이 의미 있는 공시로 저평가 해소를 시도한 것처럼 혜택을 강화해 자발적이고 내실 있는 동참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