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후 3시쯤, 서울 강남구에 있는 미래에셋증권 투자센터 압구정점 ‘VIP 세미나룸’. 가로 4m 남짓한 대형 모니터 앞에 고객 25명이 ‘다주택자 절세’ 강의를 듣고 있었다. 이 고객들은 미래에셋증권 계좌에만 최소 10억원 이상이 있는 인근 지역 거주자로, 정부의 ‘다주택자 중과세 유예 종료’를 앞두고 주택 처분 계획을 세우려고 참석했다.
이날 뉴욕 맨해튼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고 밝힌 여성 고객은 “내가 가진 뉴욕집은 뉴욕대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 임대 수요가 많고 월세 수익률이 높은데도 평당 1억원 수준인데, 압구정집은 평당 2억원이 훌쩍 넘는다”며 “현실적으로 한국 부동산이 고평가된 게 아닌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지혜 미래에셋증권 압구정센터장은 “지난해 정부의 부동산 규제가 강화된 시점부터 부동산과 세무 관련 문의가 급증했고, 상당수 고객이 주택을 팔고 확보한 현금으로 국내 증시에 재투자를 원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최근 국내 증시가 고공 행진을 이어가면서 압구정 ‘큰손’들 사이에서 부동산을 일부 처분하고 증시로 ‘머니 무브(자금 이동)’가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고액 자산가도 피하지 못한 ‘포모’
실제로 압구정점 고객들의 자산 포트폴리오도 달라지고 있다. 김 센터장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압구정 고객들은 달러와 미국 채권 등 외화 자산의 투자 비율이 컸는데, 최근 환율이 1500원대까지 치솟으면서 달러를 팔아 수익을 낸 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우량주로 돈을 옮기고 있다”고 했다. 미래에셋증권의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 지점의 고객 예수금과 국내 주식 평가액은 지난해 3월에서 올해 3월까지 각각 137%, 55% 폭증했다.
김승환 압구정센터 팀장은 “고액 자산가의 마음을 움직인 요인은 결국 수익률”이라며 “지난 한 해 동안 국내 증시가 기록적인 상승세를 보이면서 고객들의 국내 주식 매수 규모나 증가율이 해외 주식을 압도했다”고 했다. 김민주 압구정센터 팀장은 “작년 4분기부터 업무 창구 직원들이 점심을 못 먹을 정도로 내점 고객이 급증했다”며 “상담을 해보면 대부분 ‘포모(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심리가 커지면서 현금을 들고 은행 대신 증권사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
◇‘삼전닉스’로 몰리는 자산가들
실제로 최근 국내 고액 자산가들이 코스피 대형주로 몰려가는 흐름이 포착된다는 분석이다. 삼성증권이 자산 가치 30억원 이상 고객의 국내 주식 매매 동향을 분석한 결과 삼성전자가 지난달 순매수(매수가 매도보다 많은 것) 규모 1위로 집계됐다. 지난 한 달 동안 순매수액만 1143억원에 달했다. 이어 SK 하이닉스(325억원), 코스피 200 지수를 2배로 추종하는 KODEX레버리지(208억원), 삼성전자우(179억원) 등이 상위권에 올랐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반도체 수퍼 사이클에 힘입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빅테크 못지않은 매력적인 투자처로 떠오르면서 그동안 국내 증시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고액 자산가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며 “특히 지난달은 이란 전쟁으로 대형 우량주의 주가가 출렁이자 기회를 엿보던 이들이 대거 매집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당분간 고액 자산가 매수세 지속”
전문가들은 증시를 부양하려는 정부의 정책 기조와 고환율로 해외 투자 부담이 커진 만큼 당분간 고액 자산가의 ‘사자’ 행렬이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다.
김준영 iM증권 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은 가계 자산에서 주식과 같은 금융 자산의 비율이 확대되는 ‘가계의 구조적 자산 재배분’ 과정에 있다”며 “개인 수급은 변수가 아닌 상수로 봐야 하며 그 영향력도 갈수록 커질 것”이라고 했다. 김 연구원은 현 정부의 정책 기조도 고액 자산가의 증시 유입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정부의 부동산 투자 규제 또한 증시 자금 유입에 도움이 되고 있다”며 “배당소득 분리 과세 시 금융소득 5000만원 이상 고액 자산가의 예금 자산의 20%에 해당하는 약 62조1000억원이 국내 증시로 유입될 전망”이라고 했다.
고환율로 해외 증시 투자의 진입 장벽이 높아진 데다 최근 출시된 국내 시장 복귀 계좌(RIA)도 국내 증시로 머니무브를 부추기는 배경이다. 40대 서학개미 김씨는 “환율이 1500원대를 돌파한 이후 달러를 전부 환전해 국장에 몰빵했다”며 “올해 국내 증시의 증권가 전망도 좋은 만큼 절세 혜택도 누릴 겸 앞으로 1년 동안은 국장에서 투자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