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식시장에서 외국인들의 순매수가 1조원 가까이 됐습니다. 외국인의 원화 수요가 많을 것 같은데도, 외환시장에는 달러 사자만 있고 원화 사자는 실종된 상태네요.”
2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원화 환율이 장중 1484.3원까지 올랐다. 지난 4월 9일(장중 1487.6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시장에서는 외환당국이 기업과 금융회사의 내년 재무제표 작성 기준이 되는 연말 종가를 1480원선 밑으로 낮추는 ‘관리’에 들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지만, 이런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원화 환율은 그 선을 뚫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최근 삼성전자·현대차 등 7대 수출기업을 불러 보유한 달러를 가급적 빨리 팔아달라고 ‘협조’를 구하고, 금융감독원이 증권사들의 해외주식 마케팅을 자제하도록 지도에 나서는 등 정부가 환율 잡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지만, 약발이 좀처럼 먹히지 않고 있다. 도리어 ‘실탄 없는 블러핑(허세)’라는 말이 나오며 오히려 환율이 더 오르는 경향마저 보인다.
◇고장 난 원화… 사는 사람이 없다
외환 위기나 금융 위기도 아닌데 원화가 위기 때 수준의 약세를 보이는 원인을 찾으려면 올해 환율 추이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미국 관세 불확실성으로 지난 4월 8일 원화 환율이 1480원 위로 치솟은 후 6월 말 1353원까지 떨어졌다. 관세 전쟁을 시작한 미국의 달러 가치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7월 들어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바짝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이때 한·미 투자 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대미(對美) 투자 펀드’를 지목한다. 연간 200억달러 규모로 결정된 전에 없던 대규모 달러 유출 계획이 원화 사자 세력의 씨를 말렸다는 것이다. 정부는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없는 정도로만 대미 투자를 하도록 약속했다”고 했다. 하지만 당국이 보유한 외화 자산의 운용 수익으로는 연 150억~200억달러를 빠듯하게 메우고 남는 여유분이 없을 것이라는 걱정이 많다.
개인 투자자와 국민연금 등 기관의 해외 투자도 구조적 원화 약세 원인으로 굳어졌다. 경상수지가 지난 10월까지 30개월 연속 흑자를 기록했지만 개인, 기업, 국민연금 등 경제 주체의 해외 투자는 이보다 큰 폭으로 증가했다. 경상수지 흑자 유입액과 증권 투자, 직접 투자 등으로 유출된 금액을 비교해 보면 10월 자금 순유출 규모는 69억9000만달러에 달했다.
시장에서는 외환 당국이 말만 앞세우지 달러를 푸는 실제 개입에 나서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외화 비상금인 외환보유액은 오히려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지난 5월 4000억달러를 위협받았지만, 6월 이후 5개월 연속 늘어나며 10월 말 4288억달러를 기록했다. 익명을 요구한 외환시장 참가자는 “당국이 개입 의지를 밝힐 때마다 환율 상단이 열리고 있다”며 “(당국이) 실탄 없는 ‘종이 호랑이’ 느낌”이라고 했다.
이날 부산 해양수산부 임시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 공개발언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고환율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최근 이어졌던 경제부처 업무보고에서도 환율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는 없었다.
◇수퍼 엔저에 日 당국은 강력 구두 개입
원화 약세는 전방위적이다. 영국 파운드화 대비 원화 환율은 이날 10원 가까이 뛰어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2000원을 넘기는 등 주요 통화 대비 원화 가치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을 보이고 있다. 교역 구조와 각국 물가 차이를 반영한 실질실효환율은 이미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때 수준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11월 말 기준 한국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87.1로 주요 64개국 중 꼴찌인 일본(69.4) 다음으로 낮다. 이 지수는 수치가 낮을수록 통화 가치가 낮은 걸 뜻한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4월 말(85.5),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1월 말(86.6)과 비슷하다.
그나마 원화와 같은 추세였던 엔화마저 방향을 바꿀 조짐이다. 일본은 최근 30년 만에 정책금리를 종전 ‘0.5% 정도’에서 ‘0.75% 정도’로 0.25%포인트 인상했는데도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거꾸로 더 떨어지자, 당국이 강한 구두 개입에 나섰다. 가타야마 사츠키 일본 재무상은 이날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엔저에 대해 “펀더멘털에 부합하지 않는 명백한 투기적 움직임이다. 단호히 조치를 취할 자유로운 재량권(free hand)을 갖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전날 달러당 157.4엔까지 올랐던 엔화 환율은 155.9엔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