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자가를 두고 대기업에 재직 중인 김 부장(54)은 최근 자기 또래의 주인공이 퇴사 후 고군분투 하는 내용의 드라마를 보며 남 일 같지 않다고 느꼈다. 회사와 가정을 오가며 버텨온 중년 가장의 삶, 그리고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겹쳐졌기 때문이다. 최근 그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에 건강검진을 예약했다.
취업을 준비 중인 딸과 아직 어린 늦둥이 아들을 바라보며, 10여 년 전 가입해 둔 종신보험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도 앞선다. 만약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전업주부인 아내와 자녀들이 사망보험금을 과연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보험은 준비했지만, 보험금이 지급된 이후의 모습까지는 충분히 그려보지 못한 것이다.
◇사망시 신탁사가 보험금 대신 수령
유사시에 대비해 종신보험에 가입했지만, 사망보험금이 계획과 달리 단기간에 소진되거나 사기 피해로 이어진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수익자가 미성년자이거나 고령자, 장애인인 경우에는 보험금을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법정 대리인이나 제3자가 관리하게 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제도가 바로 ‘보험금청구권 신탁’이다. 보험금청구권 신탁은 재산 관리 경험이나 능력이 부족한 유가족이 상속 재산을 보다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다.
보험계약자가 사망보험금을 받을 권리를 미리 신탁회사에 맡겨두는 구조다. 계약자가 사망하면 신탁회사가 보험금을 대신 수령한 뒤 신탁계약에서 정해진 내용에 따라 수익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한다. 지급 시기, 지급 방식, 지급 금액을 사전에 명확히 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탁은 위탁자가 수탁자에게 금전이나 부동산과 같은 재산을 이전하고, 수탁자가 이를 관리·처분·운용해 수익자의 이익이나 특정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법률 관계다. 보험금청구권 신탁의 경우 신탁되는 대상이 현금이나 부동산이 아니라 ‘보험금청구권’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3000만원 이상 일반 사망에만 한정
보험금청구권 신탁은 보험의 재정적 지원 기능과 신탁의 체계적이고 유연한 자산관리 기능을 결합한 제도다. 신탁회사가 보험금을 안전하게 보관·관리하고 계약에서 정한 내용에 따라 지급하기 때문에 유가족은 사전에 계획된 방식으로 보험금을 활용할 수 있다. 또 지급 대상과 조건을 명확히 설정함으로써 가족 간 분쟁을 예방할 수 있다. 미성년자·장애인·고령자 등 보호가 필요한 가족의 재산을 보다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기존에 보유 중이거나 신규 가입하는 보험 모두 신탁을 설정할 수 있다. 단, 모든 보험에 무제한으로 적용할 수 있진 않으며, 다음 네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신탁 설정이 가능하다.
첫째, 보장 대상은 3000만원 이상 일반사망 보장에 한정된다. 재해사망이나 질병사망 특약은 보험 사고 발생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점을 고려해 신탁 대상에서 제외된다. 둘째, 보험 계약자와 피보험자, 그리고 신탁의 위탁자는 동일인이어야 한다. 보험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다른 구조의 계약은 보험금 청구권 신탁 설정이 불가능하다. 셋째, 신탁의 수익자는 직계 존비속과 배우자로 제한된다. 넷째, 보험계약에 보험계약대출이 설정되어 있으면 보험금 청구권 신탁을 체결할 수 없다.
◇자녀 결혼 때 주도록 설정 가능
앞서 김 부장은 사망 보험금 5억원을 딸과 아들에게 각각 50%씩 배분하기로 했다.
딸의 경우 김 부장 사망 시 3000만원을 먼저 받고, 결혼 시 1억원을 추가로 일시금으로 받도록 했다. 나머지 금액은 10년 동안 매월 100만원씩 생활비 형태로 지급받도록 설계했다. 아들 역시 사망 시 3000만원을 지급받고, 대학 입학 시와 결혼 시 각각 5000만원을 받도록 했다. 이후 10년간 매월 100만원씩 정기 지급을 받도록 구성했다. 이처럼 보험금청구권 신탁을 활용하면 사망보험금을 자녀의 성장 과정과 생애 이벤트에 맞춰 단계적으로 이전되는 자산으로 설계할 수 있다.
보험금청구권 신탁은 위탁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비교적 유연하게 관리할 수 있다. 수익자를 새로 지정하거나 변경할 수 있고, 지급 조건 역시 조정할 수 있다. 다만 위탁자가 사망한 이후에는 신탁계약 내용이 확정되기 때문에 변경이나 해지가 불가능하다. 또 수익자의 고의로 인해 위탁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해당 수익자는 수익권을 상실하게 된다.
◇보험계약대출시 신탁 무효
신탁계약에서는 사망 사실을 신탁회사에 통보할 사망통지인을 지정할 수 있다. 미성년자나 장애인 수익자를 보호하기 위해 신탁관리인을 둘 수도 있다. 사망통지인은 수익자 본인이나 제3자 모두 가능하고, 신탁관리인은 친권자나 후견인을 대신해 신탁재산 관리 전반을 보조한다. 이러한 장치는 필수는 아니지만, 보호가 필요한 수익자가 있는 경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 먼저, 신탁이 설정된 보험계약에서 보험계약대출을 실행하면 신탁계약은 무효가 된다. 신탁 설정 이후에도 약관대출 자체는 가능하지만 대출이 발생하는 순간 신탁계약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처리된다.
보험금청구권 신탁은 원금이나 수익을 보장하는 상품이 아니다. 신탁재산 운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익과 손실은 모두 수익자에게 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