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일본은행(Bank of Japan) 건물에서 일본 국기가 흔들리는 모습./로이터·연합

“엔화의 일방적이고 갑작스러운 움직임, 특히 지난주 통화정책회의 이후의 움직임이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과도한 움직임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할 것입니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연중 최저 수준까지 떨어져 160엔을 바라본 22일, 일본 최고 외환 당국자인 미무라 아츠시 일본 재무성 재무관이 결국 구두개입에 나섰다. 그러나 엔화 약세 흐름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지난 19일 일본은행(BOJ)이 30년 만에 정책금리를 종전 ‘0.5% 정도’에서 ‘0.75% 정도’로 0.25%포인트 인상했는데,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거꾸로 더 떨어지는 중이다.

금리 인상 직전인 지난 18일 장중 1달러당 155.4엔이었던 엔화 환율은 금리인상 발표 직후 장중 157.7엔까지 올랐다. 미국이 앞서 이달 10일 기준금리를 내렸고 일본은 금리를 올리면서 양국의 금리차가 3년 만에 최저로 줄어들어 엔화 약세 기조가 주춤해질 것이란 시장 예상과 달리, 엔화 가치는 약 1.5% 하락한 것이다. ‘엔화가 고장났다’는 말까지 나오는 이유다.

◇일본은행 총재에 실망한 시장

엔화가 거꾸로 움직이는 이유로는 일단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의 19일 기자회견 발언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우에다 총재가 지속적인 금리 인상 가능성을 강하게 얘기하지 않고, 앞으로 “경제·물가·금융상황에 따라 계속 금융 완화 정도를 조정할 것”이라는 교과서적인 답변을 내놓은 데 시장이 실망한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BOJ가 계속 공격적으로 긴축할 것이라는 베팅이 약해지면서 금리인상 직후에도 엔 캐리 트레이드 포지션이 유지됐다”며 “이게 엔화 약세 압력을 키웠다”고 분석했다. 일본 주식 정보 사이트 민카부(MINKABU)에는 “금리를 올려도 환율을 되돌릴 만큼의 정책 확신과 가이던스가 보이지 않았다”는 평가글이 올라왔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가 19일 일본은행 본점에서 기자회견하는 모습. 이날 일본은행은 정책금리를 '0.5% 수준'에서 '0.75% 수준'으로 인상했다./EPA연합

BOJ가 정책금리 수준을 거품 경제 붕괴 직전 수준까지 어렵사리 높인 만큼, 시장이 추가적인 인상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평가도 있다. 강현기 DB증권 연구원은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이 틀을 깨는 금리 정책을 단행할 경우, 경제 주체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관찰 시간을 가진다”며 “BOJ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상당 기간 기준금리가 지금의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투자자들의 기대가 퍼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기대를 깨려면 BOJ 총재가 더욱 강한 매파적 메시지를 보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얘기다.

◇문제는 확장 재정…”돈 많이 풀리는데 별수 있나”

일본 국채 30년물 금리(3.43%)가 한국 국채 30년물 금리(3.24%)를 웃돌고, 일본 국채 10년물 금리는 2.0%를 돌파한 이후 2.1%까지 올라 1999년 이후 27년 만에 최고 수준이 됐다. 채권 금리는 가격과 반비례 관계다.

금리가 기록적인 수준까지 높아진 데서 보듯, 지난 10월 취임 이후 대규모 지출 계획을 발표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체제 이후 일본 재정 상황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엔화 가치도 발목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앤드루 피즈 러셀인베스트먼트 아태 투자책임자는 FT(파이낸설타임스)에 “(당황스러운 엔화의 움직임은) 시장이 일본 재정 상황을 우려하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다카이치 내각은 21조3000억엔(약 200조원) 규모의 종합 경제 대책을 내놨다. 팬데믹 이후 최대 규모의 경제 대책으로, 시장에서는 ‘고압 경제’ 대책이라는 말이 나왔다. 디플레 탈출과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가 재정 지출 확대와 공격적 임금 인상 유도 등을 통해 경기를 의도적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는 정책 기조라는 뜻이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한유진

미쓰비시UFJ금융그룹은 “최근 일본 국채 금리 상승은 빠른 경제성장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라, 재정 악화와 일본 국채 흡수 능력에 대한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며 “금리 상승이 엔화 강세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원-엔 동조화…원화 약세에도 악영향

블룸버그에 따르면 최근 엔화와 원화의 상관관계는 2007년 이후 최고로 높아졌다. 이는 태국 바트, 말레이시아 링깃, 역외 위안화, 타이완 달러 등 아시아 다른 통화와 비교할 때 가장 상관계수가 높다. 엔화가 약세로 움직일수록 원화도 함께 약세로 움직이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의미다.

두 나라 통화 모두 미국 금리와 변화하는 글로벌 위험 선호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데다(블룸버그통신), 양국 모두 자국민들의 해외투자 확대로 골치를 앓고 있다는 공통점(니혼게이자이신문)도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의 엔화 약세에 대해 “소액투자 비과세제도(NISA)를 통한 개인들의 대규모 해외 투자 자본 유출이 매년 10조엔 규모의 엔화 매도 압력을 키운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경우 최근 해외주식 매수세가 주춤한데도 환율이 달러당 1480원을 넘나들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이달 들어 하루 평균 해외주식 순매수는 약 1억4200만달러(약 2100억원) 규모로, 전월(일 평균 2억7600만달러) 대비 절반 수준에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