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구리 가격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런던금속거래소(LME)에 따르면 지난 19일 구리 가격은 정산가 기준 톤당 1만1886.23달러까지 올랐다. 이는 작년 말(8652.67달러) 대비 약 37%, 지난달 말(1만1233.69달러)과 비교해도 약 5.8% 상승한 수준이다. 경기 흐름을 반영하는 대표 원자재로 꼽히는 구리가 기록적인 강세를 보이면서, 관련 금융 상품으로도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 이달 들어 19일까지 국내 상장지수펀드(ETF) 가운데 ‘TIGER 구리실물’은 8.5%, ‘KODEX 구리선물(H)’은 6.1% 상승했다. 두 ETF의 작년 말 대비 상승률은 각각 29.4%, 25.1%에 달한다. 구리 가격 상승이 ETF 수익률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 산업 생산 둔한데 가격은 급등… 과거와 달라진 구리 흐름
구리는 오랫동안 글로벌 산업 생산과 밀접하게 움직였다. 제조업 가동률이 오르고 건설·인프라 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 구리 수요가 증가했고, 이 기대가 가격에 먼저 반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구리는 ‘닥터 코퍼(Dr. Copp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최근 흐름은 과거와 다르다. 네덜란드 경제정책분석국(CPB)이 산출하는 전 세계 산업생산은 작년 말 대비 올해 9월까지 약 2.5% 증가하는 데 그쳤다. 주요국 제조업 지표도 지역별로 둔화와 정체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구리 가격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외신들은 최근 구리 강세의 배경으로 글로벌 제조업 회복보다는 공급 차질, 지역별 가격 프리미엄 확대, 재고 이동에 따른 수급 왜곡 등 구조적 요인을 지목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의 원자재 칼럼니스트 앤디 홈은 최근 칼럼에서 “구리 가격은 기록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글로벌 제조업 부문이 같은 속도로 달아오른 것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국내 증권사들도 비슷한 진단을 내놓고 있다. 장재혁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대형 광산 차질과 정광 공급 부족이 이어지면서 구리 공급 여건이 타이트해진 상태”라며 “제련 수수료(TC)가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점도 공급 압박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김유민 한화투자증권 연구원도 “관세와 정책 불확실성으로 구리 재고가 특정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단기 수급이 왜곡되고 있다”고 말했다.
◇AI·전력망 수요 부각…구리, ‘경기 민감 자원’에서 벗어나다
향후 구리 가격을 둘러싼 논의의 핵심은 전력 인프라 투자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최근 원자재 시장에서 특히 구리에 대해 강세 전망을 유지하고 있다. 전력망과 냉각 인프라 등 AI 투자 확대에 따라 구리가 단순한 경기 민감 원자재를 넘어 AI 인프라 필수 자원으로 재평가받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2030년까지 구리 수요 증가분의 약 60%는 글로벌 전력 인프라 투자에서 발생할 전망이다. 최원석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냉각 인프라 확대로 구리 수요의 중심이 기존 제조업에서 인프라 투자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책 변수도 가격 상승 배경으로 거론된다. 미국이 2027년부터 정제 구리 수입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관세 적용 이전에 구리를 확보하려는 비축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LME 기준 구리 현물 가격은 올 들어 40% 가까이 상승했고, 최근 한 달 동안에도 10%가량 올랐다.
공급 측면에서는 신규 광산 개발이 제한적이라는 점이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신규 광산 부족과 광산 업체들의 보수적인 투자 기조로 공급 탄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씨티는 최근 보고서에서 구리 가격 전망치를 상향 조정하며 내년 초 톤당 1만3000~1만5000달러 범위를 제시했다. AI 인프라 중심의 수요 확대와 제한적인 공급 여건이 맞물릴 경우 가격 강세가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다만 원자재 가격은 수급과 정책, 금융시장 환경에 따라 변동성이 크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