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30년 동안 굳어졌던 ‘금리는 오르지 않는다’는 시장 참가자들의 통념이 마침내 변하고 있다.”(오구치 마사유키 미쓰비시UFJ자산운용 수석펀드매니저)
19일 일본은행(BOJ)이 30년 만에 기준금리를 0.75% 수준으로 올리자, 대표적 지표 금리인 일본 국채 10년물 금리가 이날 2.0%를 돌파했다. 이 금리가 2.0% 선을 넘어선 것은 2006년 이후 19년 만에 있는 일이다.
일본 국채 30년물 금리도 이날 3.4%를 넘어서면서, 한국 국채 30년물 금리(3.2%)를 웃돌았다. 일본이 더는 구조적 저금리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잃어버린 30년과 이별한 일본
1990년대 부동산 거품 붕괴 이후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30년’으로 기록되는 긴 침체 시기를 지났다. 2016년 2월부터 약 8년간은 기준금리가 마이너스(-0.1%)인 시기도 보냈다. 그러다 아베노믹스의 대규모 통화 완화 정책이 뒤늦게 작동하면서 물가가 오르기 시작, 2024년 5월 기준금리를 0.1%로 올리며 다시 ‘금리 있는 세계’로 진입했다.
11월 일본 소비자물가가 전년 대비 3% 오르는 등 44개월 연속 일본은행의 물가 목표치 2%를 넘어서면서 이제 일본 경제는 완전히 궤도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채 10년물 금리도 2% 벽을 넘었다. 닛케이신문은 “가파르게 상승하는 장기 금리는 전환점을 맞은 일본 경제의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지난해 금리 인상을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일축했었다. 금리 인상이 엔화를 강세로 되돌릴 가능성은 있지만, 엔화가 의미 있게 강해지기에는 여전한 미·일 금리 차 등 때문에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금리 인상이 일본 국채 금리를 밀어올려 가뜩이나 빚 많은 정부의 이자 부담만 더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그러나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금리 인상 시기를 놓치면 나중에 더 큰 폭의 금리 인상을 단행해야 할 수도 있다”며 금리 인상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에다 총재, 추가 인상 시사
시장에서는 이달 초 금리 인상을 강하게 예고했던 우에다 총재가 이날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금리 인상 속도에 대해 힌트를 줄지에 이목이 쏠렸다. 우에다 총재는 “경제·물가·금융 상황에 따라 계속 금융 완화 정도를 조정할 것”, “금리에서 물가 상승률을 뺀 실질 금리가 아직 매우 낮은 수준에 있다”며 내년에도 금리 인상 노선을 유지할 것임을 시사했다.
또 현재 정책금리 수준이 경기를 과열시키지도 냉각시키지도 않는 금리 수준인 중립금리 하한에서 아직 거리가 있다면서 추가 인상 여지를 숨기지 않았다. 일본은행은 그간 현재 중립금리 수준이 1.0~2.5% 사이라고 밝혀왔다.
BOJ 이사 출신인 하야카와 히데오는 최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BOJ가 이번 인상 이후 추가로 세 번 더 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있다”며 “그들(BOJ)은 아마도 (금리 인상 대응에) 완전히 뒤처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리를 0.25%포인트씩 세 차례 추가 인상한다면 최종 금리는 1.5% 수준이 된다.
◇엔 캐리 청산 위험 여전
금리 인상이 발표됐지만 이날 엔화 가치는 도리어 더 떨어졌다. 원화 가치도 큰 변동이 없었다. 엔화와 원화는 최근 세계 주요 64국 통화 중 나란히 가치 하락 1·2위를 달리고 있다. 금리 인상과 별개로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이 11조7000억엔(약 110조원) 규모 국채를 추가로 발행하기로 하는 등 재정 확대 정책을 펴고 있어 당분간 엔저가 지속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주요국 증시도 상승 마감했고, 최고의 위험 자산인 비트코인 가격도 개당 8만5000달러 선에서 8만7000달러 선으로 올랐다. 일본의 금리 인상이 그간 값싼 엔화로 고수익 자산에 투자해 온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을 불러 금융시장에 혼란이 빠질 것이라는 우려는 일단 무색해졌다.
그러나 일본의 점진적인 금리 인상이 계속되면 어느 순간 결국 엔 캐리 청산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프레데릭 노이만 HSBC 아시아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일본 금리가 오르면 일본인들로선 국내 자산이 해외 자산보다 상대적으로 더 매력적으로 보여 해외 보유 자산을 팔고 자금을 국내로 되돌릴 유인이 생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 향후 2~3년 안에 일본 금리가 1% 또는 2%로 올라갈 경우 일본 투자자들이 다른 나라 국채 보유를 줄이면서 세계 금융시장에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