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김모(68)씨는 시세 15억원인 아파트에 산다. 그런데 매달 손에 쥐는 돈은 국민연금 80만원이 전부다. 주변에서 집값이 올랐다며 부러워하지만 부부의 생활비를 감당하기엔 부족할 때가 많다. 경조사비처럼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는 달이면 생활은 더 빠듯하다. “집은 있는데 쓸 돈이 없다”는 김씨의 말은 한국 은퇴 세대의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노후 준비의 핵심은 유동성
노후 생활비 부족은 많은 은퇴 세대가 공통으로 겪는 문제다. 우리나라는 가계 자산에서 부동산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가계 자산 중 75%가 부동산 등 실물 자산이다. 60세 이상 가구는 그 비율이 80%가 넘는다. 부동산은 장기적으로 가격 상승세가 이어지며 자산 증대에 큰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현금화하기 어려운 특성상 즉시 자금으로 활용하기엔 한계가 있다.
여기에 빠르게 늘어난 평균 수명도 노후 생활비 부족에 한몫하고 있다. 지난해 기대 수명은 84세로, 1985년의 기대 수명(69세)보다 15년 늘어났다. 60세 전후에 은퇴하면 이후 20~30년을 더 살아간다는 얘기다. 이 시기에 어떻게 지속적인 현금을 마련하느냐가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은퇴자 자산 비율이 큰 부동산과 보험을 활용할 수 있다.
은퇴 후 평생 직업이나 다른 소득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현재 보유한 자산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현금 흐름으로 바꿔갈지가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때 관련 제도를 활용하면 보다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자산을 ‘흐르는 돈’으로 전환할 수 있다.
◇가장 큰 자산을 ‘평생 월급’으로
우선 은퇴자 자산 비율이 큰 부동산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부동산은 노후 소득으로 활용하기 어려운 자산 중 하나다. 다주택자인 경우 임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1주택자는 매각 시 거주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이때 주택연금은 거주를 유지하면서도 집의 가치를 평생 소득으로 바꿔주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다.
주택연금은 한국주택금융공사가 제공하는 역모기지 상품이다. 본인이 거주하는 주택을 담보로 제공하고 매달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집에 계속 살면서 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산을 현금 흐름으로 바꾸는 대표적인 방안으로 꼽힌다. 이때 주택의 담보는 제공하지만 소유권은 유지되며, 사망 후에는 이를 매각해 정산하고 남는 금액이 있으면 상속된다. 사망 후 주택 가치가 부족해도 상속인에게 추가 부담이 돌아가지 않는 방식이라 안정성도 높다.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기준 주택연금의 평균 월 지급금은 126만원으로, 국민연금 평균 수령액 62만원을 넘어선다.
주택연금에 가입하려면 연령과 주택 가격 등 가입 요건을 만족해야 한다. 부부 중 1명이 55세 이상 국민이며, 공시가격 12억원 이하 주택 소유자여야 한다. 다주택자도 합산 가격 12억 이하면 가능하고, 주택, 노인복지주택, 주거 목적 오피스텔을 대상으로 한다. 또 가입자 또는 배우자가 실제 거주지로 이용해야 한다. 주택 연금의 가장 큰 장점은 ‘평생 월급화’다. 가입 시점부터 사망 시까지 안정적으로 월 지급액을 확보할 수 있어 장수 리스크를 줄여준다. 월 지급금은 부부 중 연소자의 연령과 주택 가치, 지급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5억원 가치의 아파트를 보유한 60세 가입자는 매월 약 100만원을 평생 정액으로 받을 수 있다. 같은 조건에서 70세 가입자의 월 지급금은 약 149만원으로 증가한다. 이후 집값이 하락하더라도 가입 시점에 확정된 연금액이 유지되므로, 안정적인 수입이 지속된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보장과 연금을 동시에
주택 다음으로 많은 고령자가 보유하고 있는 큰 자산은 보험이다. 보험은 다른 금융 자산과 달리 중도 해지 시 미래 위험에 대한 보장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활용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히 종신보험의 경우 사망보험금은 크지만 당장 받는 혜택이 적거나, 물가 상승을 생각하면 나중에 받을 보험금 가치가 떨어질 우려가 가입자의 주된 불만으로 꼽힌다.
지난 10월 도입된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종신보험을 활용해 사후 보험금 대신 생전에 노후 생활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제도다. 사망보험금의 최대 90% 이내에서 유동화 비율을 설정해 그에 해당하는 해약 환급금을 재원으로 매년 연금을 받을 수 있다. 가입 조건은 금리 확정형 종신보험 중 신청 시점에 피보험자가 만 55세 이상이며, 주계약 사망보험금 9억원 이하, 계약 기간·납입 기간 10년 이상으로 납입 완료된 계약이어야 한다. 또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동일해야 하고 보험 계약 대출 잔액이 없어야 한다.
수령액은 계약·유동화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데 해약 환급금이 많을수록, 유동화 비율이 높을수록, 수령 기간이 짧을수록 매년 받는 금액이 증가한다. 예를 들어 사망 보험금 9000만원인 보험의 63세 계약자가 90% 비율로 10년 유동화한 경우 연평균 수령액은 460여 만원, 월 환산 35만~40만원 수준으로 기대된다. 같은 조건으로 20년간 유동화 시 수령액은 월 환산 20만~25만원으로 감소하지만 총 수령 금액은 증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