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관계자가 달러화를 정리하는 모습. /뉴스1

글로벌 투자·자금조달 지형이 ‘미국 중심’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달러 약세 기조와 함께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추가 금리 인하 가능성이 커지면서, 글로벌 기업들의 달러 선호가 약해지고 유럽 등 비(非)미국 시장으로 자금 흐름이 이동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亞, 달러보다 유로로 조달

7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기업 및 정부의 유로화 채권 발행 비중은 전체 외화채 중 23%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6%포인트 증가한 수치이며, 발행액도 75% 급증해 864억 유로(약 1007억 달러)에 달했다. 같은 기간 달러화 채권 발행도 증가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대형 딜이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중국 정부는 40억 유로 규모의 유로화 표시 국채를 발행했는데, 투자자들의 입찰 규모가 1045억 유로를 넘어서며 역대 최대 수요를 기록했다. 일본 통신회사 NTT 또한 올해 아시아 최대 유로화 발행 사례로 기록되는 55억 유로 규모의 유로화 채권을 발행했다. 블룸버그는 “달러화 우위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흔들리며 유로화 자산에 관심이 늘었고, 아시아 차입자들도 이에 동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올해 달러가 유로화 대비 11% 약세를 보이며 유로화로 자금을 조달한 뒤 달러로 환전할 때 드는 비용이 5년 만에 최저 수준까지 낮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다니엘 킴 HSBC 아시아태평양 채권자본시장 공동대표는 “유로화 발행은 단순한 리파이낸싱이 아닌 전략적 전환”이라며 “핵심 동인은 미국 달러화 편중에서 다각화할 필요성”이라고 했다.

◇비(非)미국 시장 투자도 재부각

투자 측면에서도 미국 외 시장에 대한 선호가 강화될 조짐이 뚜렷하다. 최근 케임브리지 어소시에이츠는 보고서에서 “경제 정책의 불확실성, 자산 과대평가, 재정 압박에 따른 역풍이 미국 달러에 대한 세계 수요를 약화시킬 수 있다”며 “지금은 투자자들이 미국 주식 비중을 점검할 시점”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을 제외한 지역 증시의 상대적 투자 매력이 부각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환율 변동에 따른 환산 효과가 미국 외 시장의 성과를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미국 외 국가 증시는 달러 기준으로 미국 대비 13.9%포인트, 현지 통화 기준으로 6.6%포인트 더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특히 올해 신흥시장 증시는 5년 만에 선진국 증시를 웃도는 성과를 냈으며, 그중 라틴아메리카 증시는 연초 대비 37% 상승해 신흥국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수익률을 보였다.

반면 보고서는 미국 증시에 대해서는 기술·AI 중심의 편향된 랠리 구조가 계속되고 있다며, 향후 AI 테마가 약화될 경우 달러 약세와 맞물려 해외 투자자들의 주가 하락 위험이 더욱 확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내년에도 탈달러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마틴 슐츠 일본 후지쯔 경제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의 흐름은) 과거 달러 자산에 과도하게 쏠렸던 흐름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며 “세계는 이제 달러 중심의 일극 체제가 아닌 다극화된 통화 질서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