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 중구 명동 환전소 모습. /연합뉴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470원을 넘어서는 등 1500원선에 바짝 다가서자 외환당국이 총동원 체제에 들어갔다. 평소 같으면 시중은행이나 대형 수출기업, 국민연금 정도만 만나지만, 최근 환율을 밀어올린 주된 요인으로 ‘서학개미’(해외주식에 투자하는 국내 개인)의 해외주식 결제 수요가 지목되면서, 정부는 이미 수출 대기업을 불러 의견을 듣고, 국민연금과 4자 협의체를 꾸린 데 이어, 증권사들까지 소집했다. 환율을 잡기 위해 시장의 거의 모든 큰손들을 줄줄이 불러모은 것이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 “아침 9시에 달러가 몰린다”… 정부, 증권사에 원인·대책 요구

외환당국은 지난 21일 미래에셋증권·한국투자증권 등 9개 대형 증권사 외환 담당자들을 모아 비공개 회의를 열었다. 외환 이슈로 증권사를 직접 소집한 것은 드문 일로, 정부는 최근 장 초반 환율이 튀어 오르는 원인 중 하나로 증권사들의 개장 직후 대량 환전 관행을 주목했다.

핵심 배경은 서학개미의 해외주식 매수 폭증과 증권사의 통합증거금 시스템이다. 지난해 101억달러(약 14조8700억원)이었던 서학개미의 해외 주식 순매수는 올해 들어 287억달러(약 42조2600억원)로 세 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달에는 68억달러를 순매수하며 역대 최대 월간 기록을 갈아치웠고, 이달에도 24일까지 이미 48억달러어치를 사들이며 강한 매수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폭증한 해외주식 결제 수요가 다음 날 오전 9시에 한꺼번에 환전 주문으로 몰린다는 점이다. 증권사들은 하루 동안 고객이 사고판 외화 거래를 밤사이 통합해 정리한 뒤, 부족한 금액만 외환시장 개장 직후에 일괄 매수하는 구조를 쓰고 있다. 예컨대 A가 1000달러를 팔고 B가 500달러를 샀다면, 실제로는 차액 500달러만 사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증권사가 이 부족분을 개장과 동시에 동시에 사들이다 보니, 당국은 이 구조가 장 초반 환율을 급하게 끌어올리는 ‘9시 쏠림’의 핵심 요인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하루 평균환율(MAR)로 정산하거나, 주문 즉시 환전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확대하자고 제안했지만, 증권사들은 “수년간 시스템이 이 방식에 맞춰져 있어 당장 바꾸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 수출 대기업·국민연금도 줄줄이 소집… “달러 좀 더 내놓을 수 없나”

증권사 회의에 앞서 정부는 지난 14일 주요 수출 대기업을 불러 환율 상황을 점검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한화오션·HD한국조선해양 등 주요 수출기업 재무담당자들이 참석해, 달러를 시장에 조금 더 내놓거나 환전 시점을 조정할 수 있는지 여부를 논의했다. 하지만 업계 반응은 싸늘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미국 투자도 많고 불확실성이 커 달러를 쉽게 팔기 어렵다”며 “정부 요청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협조하겠지만 큰 변화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24일에는 기획재정부·복지부·한국은행·국민연금이 참여하는 ‘4자 협의체’도 공식 출범했다. 사실상 국민연금이 달러를 시장에 내놓거나 해외투자 속도를 조절하는 방안까지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는 의미다. 하지만 달러 수요 자체를 인위적으로 누르기는 쉽지 않다. 최근 한국 기준금리가 미국보다 1.5%포인트 낮아 자금이 금리 높은 쪽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환율을 다시 1300원대로 끌어내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환율이 지금보다 더 오를 경우 시장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을 수 있다”며 “근본적 요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단기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