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공지능)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호실적이라는 주식 시장 ‘호재’는 단 하루짜리에 그쳤다. 20일 엔비디아의 ‘깜짝 실적’에 힘입어 4000대를 회복했던 코스피는 21일 외국인의 대규모 ‘매도 폭탄’에 휘청이며 3800대로 후퇴했다. 코스피가 3800대에서 마감한 것은 지난달 23일 이후 거의 한 달 만이다.
21일 코스피는 3.79% 급락한 3853.26에 마감했다.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이 2조8308억원어치를 순매도(매도가 매수보다 많은 것)했다. 이날 외국인 순매도 규모는 이전 하루 외국인 순매도 기록인 2조8300억원(2021년 2월 26일)을 넘는 역대 최대다. 이재원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외국인이 전날까지 매수 우위를 보이다가 하루 만에 대량 순매도로 돌아선 점이 시장 충격을 키웠다”며 “특히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공격적인 외국인 매도세가 지수 낙폭을 크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라고 했다.
◇AI 거품론 공방에 출렁이는 증시
20일 미국 증시는 AI 대장주 엔비디아가 전날 장 마감 후 시장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호실적을 발표한 영향으로 상승 출발했다. 하지만 월가 곳곳에서 제기되던 AI ‘거품’ 경고가 다시 고개를 들었고, 여기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 고위 인사의 발언이 더해지며 상승세가 급격히 꺾였다. 리사 쿡 연준 이사는 이날 연설에서 “주식·회사채·주택 등 여러 자산의 밸류에이션(가치평가)이 역사적 벤치마크 대비 높은 수준”이라며 “자산 가격이 크게 조정될 가능성이 커졌다”고 경고했다. AI 관련 주식 투자 등 위험 자산 전반이 과열돼 있다는 메시지에 시장은 즉각 반응했고, 나스닥은 2.2% 하락 마감했다. 반도체 업종을 모은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도 4.8% 급락했다.
월가 전문가들도 경고의 목소리를 더했다. 매트 말리 밀러 타박 수석 시장전략가는 “AI가 지금의 주가를 정당화할 만큼의 수익을 창출할지 의문”이라며 “기업들이 쏟아붓는 막대한 AI 투자가 5년 뒤 실제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지금의 투자 열풍은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엔비디아의 실적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도 생겨났다. 월가의 유명 투자자 마이클 버리는 X(옛 트위터)에 “진짜 최종 수요는 터무니없이 적다”며 “거의 모든 고객사가 공급업체(엔비디아)에서 자금을 지원받고 있다”고 적었다.
여기에 더해 금리 결정을 두고 연준 내부에서 터진 의견 분열도 주식 시장에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금리 결정 투표권을 가진 연준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 위원들이 금리 인하를 원하는 ‘친트럼프파’와 연준 독립성을 강조하는 ‘친파월파’로 나뉘어 제각각 기준금리와 미국 경제에 대한 엇갈린 발언을 내놓으며 분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외국인 ‘매도 폭탄’에 환율은 1470원대
21일 국내 시장에선 미국 시장의 위기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특히 외국인들이 반도체주를 중심으로 대규모 매도에 나섰다. 외국인은 이날 SK하이닉스 1조4603억원, 삼성전자 7980억원을 각각 순매도했다. 사실상 외국인 순매도의 절반 이상이 두 종목에서 나온 셈이다. 이에 삼성전자는 전날보다 5.8% 하락한 9만4800원, SK하이닉스는 8.8% 폭락한 52만1000원에 장을 마쳤다.
외국인 매도세가 거세지면서 원화에서 달러로 환전 수요가 늘 것이라는 전망에 원화 환율도 급등(원화 가치 급락)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전날보다 7.7원 오른 1475.6원에 주간 거래(오후 3시 30분 기준)를 마쳤다. 이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인상 이슈가 불거졌던 4월 9일 이후 최고치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해외로 나간 자금이 더 많은 만큼, 수급 측면에서 원화 환율을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면서 “4분기에는 이런 흐름이 더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변화된 경제 구조를 감안하면 앞으로 원화 환율은 1280~1480원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례적 급등이 아닌 만큼 지나친 불안이나 위기 해석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