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5000은 충분히 가능하다’며 증시를 가파르게 밀어올렸던 외국인 투자자들이 무섭게 돌변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지난 3~7일 5거래일간 유가증권시장에서 7조2637억원을 순매도(매수보다 매도가 많은 것)했다. 주간 외국인 순매도액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계 투자은행(IB)들은 “한국 증시가 리레이팅(재평가)되고 있다”, “코스피 5000은 물론이고 6000도 가능하다”며 국내 투자자들을 들뜨게 했는데, 왜 손바닥 뒤집듯 입장이 바뀐 걸까.
◇AI 거품론, 반도체주 대장주에 타격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AI(인공지능) 거품론’이 주범으로 지목된다. 최근 국내 증시 랠리는 AI발 ‘반도체 수퍼사이클’ 최대 수혜자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투톱이 꼽히면서 시작됐는데, 이 시나리오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지난 4일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CEO(최고경영자)는 홍콩 금융 서밋에서 “기술주 거품이 상당해 향후 12~24개월 내 주식시장이 10~20%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테드 픽 모건스탠리 CEO도 “10~15% 조정은 오히려 바람직한 수준”이라며 골드만삭스의 과열 경고를 거들었다.
글로벌 금융 위기를 다룬 영화 ‘빅 쇼트’의 실제 주인공으로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예측한 마이클 버리가 이끄는 사이언자산운용이 9월 말 엔비디아와 팔란티어의 주가가 하락하면 수익을 얻는 풋옵션을 대거 사들였다는 소식도 불안을 증폭시켰다.
이에 팔란티어 주가가 5거래일 사이 13% 넘게 급락했고, 엔비디아 주가도 10% 가까이 하락했다. 글로벌 반도체 주요 기업들로 구성된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도 지난주 5.4% 내리는 등 최근 주요 증시 상승 동력이었던 반도체·테크 종목들이 일제히 약세를 보였다.
실제 외국인들의 매도세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집중됐다. 외국인들이 이번 주 가장 많이 판 종목은 SK하이닉스로, 3조7151억원어치 순매도했다. 삼성전자 순매도액도 1조5028억원으로 두 번째로 많았다.
직전 외국인들의 주간 순매도 최대는 지난 2021년 8월 둘째 주(9~13일) 기록한 7조454억원이었다. 이때 역시 외국인들은 D램 가격 하락 우려 등이 촉발한 반도체 업황 불확실성을 핑계로 반도체주를 중심으로 대거 매도에 나선 바 있다.
◇극심해지는 원화 약세
가파른 원화 약세도 외국인 투자자들에겐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7일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전날보다 9.2원 오른 1456.9원을 기록(오후 3시30분 기준)하며 1457원에 육박했다.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한 주 사이 2%나 하락해, 주요국 통화 중 절하율 1위를 기록했다.
외국인들의 국내 주식 매도가 환율 상승 요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환율 상승이 외국인들의 국내 주식 투자를 저해하기도 한다. 원화 가치가 가파르게 약화되는 국면에서는 원화로 환전해 국내 주식을 매수할 경우 앉아서 환차손을 볼 우려가 커지기 때문이다. 특히 단기 투자 자금은 환율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을 계기로 과도하게 상승했던 코스피에서 외국인이 대거 차익 실현에 나서면서 원화가 직격탄을 맞았다”며 “10월까지 한국 주식을 순매수하면서 원화 가치를 방어하는 역할을 했던 외국인의 주식시장 수급이 돌아서면서 원화 약세가 두드러졌다”고 설명했다.
◇채권 금리도 비상
최근의 국고채 금리 급등 현상도 주식시장엔 부담이다. 서울 채권시장에서 국고채 10년물 금리는 7일 3.226%로 마감하며 연고점을 돌파했고, 3년, 5년, 30년물 등 나머지 기간물도 모두 일제히 연중 최고치에 닿았다.
국채 금리는 특히 지난달 중순경부터 급등세를 탔다. 내년도 728조원 사상 최대 예산 편성에 대미 투자 펀드 조달용 채권 발행 부담, 그리고 부동산이 발목 잡고 있는 금리 인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다. 장기 금리 상승은 성장주나 고평가된 기술의 할인율을 높이기 때문에 통상 주식시장에는 악재로 작용한다. 또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장기채 매도는 다시 환율에 부담을 주는 요인이 돼 주식시장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최근 한국전력공사 채권 입찰 부진과 경기주택도시공사 유찰 등으로 국내 크레디트 시장의 투자 심리까지 위축되며 금리를 더욱 밀어 올렸다는 분석이다.
◇커지는 변동성, 전략은?
지난주 코스피 지수가 3.7% 하락하는 동안 일본 닛케이평균은 4.1%, 대만 가권지수는 2.1% 각각 뒷걸음질했다. 투자자들이 기술주를 중심으로 위험 회피 성향을 보인 탓에 한국 시장만 약세를 보인 것은 아니지만, 최근 상승세가 가장 가팔랐기 때문에 단기 조정도 두드러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성훈 키움증권 연구원은 “현재 증시 여건을 고려하면 단기적인 변동성 장세는 이어질 수 있는 구간”이라며 “증시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연방정부 셧다운(일시 업무정지) 해소 여부, 미국 10월 소비자물가지수(13일), 엔비디아 실적(19일) 등의 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하인환 KB증권 연구원은 “과거 세 차례 강세장(1998∼1999년, 2009∼2010년, 2020∼2021년) 때의 조정과 비교하면 폭과 기간이 각각 약 -10% 내외, 50일 내외라는 공통점을 이번에도 적용할 수 있다”며 “조정 초반에는 강세를 보이는 기존 소외주로 단기 대응하는 전략이 유효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