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가 ‘파죽지세’의 상승세를 보이며 27일 사상 처음 4000선마저 넘어섰다. 지난달 10일 전고점(3305.21)을 돌파한 지 불과 한 달 반 만에 700포인트를 끌어올린 이 상승세의 배경엔 반도체 ‘수퍼사이클(초호황기)’, 미국의 금리 인하, 미·중 무역 갈등 완화 기대감 등 ‘3중 호재’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 회의,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등 주요 글로벌 이벤트들을 두고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란 기대감이 높아지는 중”이라며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예상치를 밑돌면서 금리 인하 기대감이 커졌고, 미·중 정상회담에 앞서 양국 고위급 회담에서 희토류 등 주요 교역 이슈와 관련, 예비 합의에 도달했다는 보도가 전해지면서 투자 심리가 전반적으로 개선됐다”고 했다.

한국 대표 주가 지수인 코스피가 처음으로 4000선을 돌파한 27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웃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57% 오른 4042.83에 거래를 마쳤다. /장경식 기자

◇10만전자·53만닉스, 반도체 랠리 언제까지

이번 상승장의 중심에는 단연 ‘K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다. 삼성전자는 올 들어 27일까지 91% 급등하며, 10만2000원까지 올라 사상 처음 주당 10만원을 돌파했다. SK하이닉스도 같은 기간 224.6% 폭등하며, 53만5000원까지 올라 ‘53만닉스’ 시대를 열었다. 두 종목의 주가가 작년 말 수준에 머물렀다면 코스피는 지금 3300선 중반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코스피 상승분의 80%가량을 이 두 종목이 견인한 셈이다.

이 같은 상승의 배경에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 급증에 따른 반도체 ‘수퍼 사이클’에 대한 기대감이 자리한다. AI 반도체에 들어가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공급이 달리면서 글로벌 빅테크들이 한국 반도체를 찾고 있다. 여기에 일반 서버용 D램 수요도 빠르게 회복 중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이번 반도체 사이클은 단순한 재고 조정이 아닌 구조적 수요 증가에 기반한 장기 성장기”라며 “반도체 수퍼 사이클이 2027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실적 추정치도 가파르게 상향되고 있다. 금융 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내년 영업이익 추정치는 3개월 전 38조7700억원에서 현재 62조2700억원으로, SK하이닉스는 같은 기간 41조6900억원에서 58조6900억원으로 늘었다.

이미 주가가 많이 올랐지만 증권가에서는 추가 상승 여력이 남아 있다고 본다. 10월 들어 삼성전자의 목표 주가를 제시한 증권사 20여 곳의 평균치는 11만7200원으로 27일 종가 대비 약 15% 높다. SK하이닉스의 평균 목표 주가도 55만7300원으로 4%가량 더 오를 여력이 남아 있다고 본다.

◇대형주 쏠림, 언제까지 이어질까

올해 증시의 또 다른 특징은 대형주 위주의 상승세다. 유가증권 시장 시가총액 1~100위로 구성된 코스피 대형주 지수는 올해 74.7% 급등했지만, 시가총액 101~300위로 구성된 중형주 지수는 42.6%, 300위 이하로 구성된 소형주 지수는 19.7% 상승에 그쳤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유동성 장세가 펼쳐졌던 2020~2021년과는 정반대 흐름이다. 2020년 3월 19일~2021년 7월 6일 코스피가 1457에서 3305까지 오르는 동안 대형주 지수는 120.7% 상승했지만, 중형주(171%), 소형주(167.8%)는 대형주보다 더 큰 폭으로 뛰었다.

이는 최근 국내 증시가 외국인과 기관 투자자가 주도하는 장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방위산업·원전·조선 등 최근 상승 동력이 있는 업종에 대형주가 집중돼 있고, 배당도 대형주 위주로 이뤄지다 보니 외국인과 기관의 자금이 시가총액 상위 종목으로 쏠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실제로 올 들어 유가증권 시장에서 외국인과 기관은 각각 6조원, 10조원어치를 순매수(매수가 매도보다 많은 것)했다. 같은 기간 개인은 28조원을 순매도했다. 이는 개인이 86조원을 순매수하며 ‘동학 개미 운동’이라 불렸던 2020년 3월~2021년 7월 강세장과는 정반대 흐름이다. 당시에는 외국인과 기관이 각각 30조원, 54조원을 순매도했었다. 권순호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외국인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집중하면서 대형 반도체주 중심의 쏠림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대형주가 주도하는 장세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재만 하나증권 연구원은 “강세장에서는 주도 업종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며 “실적이 뒷받침되는 주도주 중심의 재평가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만이 아니다… 미·일·대만 ‘에브리웨어 랠리’

뜨거운 주가는 비단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24일 뉴욕 증시에서 다우지수, S&P500지수, 나스닥지수가 모두 사상 최고치 기록을 갈아치웠다. 27일 일본 닛케이평균도 사상 처음으로 5만 선을 돌파하는 새 기록을 썼고, 대만 자취안지수도 이날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도 10년 만에 4000선 재돌파를 눈앞에 두는 등 올해 주식시장에 불이 붙은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선진국과 신흥국 등 47국 증시 3000종목을 담은 MSCI 세계지수(MSCI ACWI)는 올해 달러 기준으로 26% 올랐다.

미국에서 출발한 AI 투자 붐이 반도체 등 관련 산업 비중이 높은 아시아 주요국 증시에 새로운 기대감을 불어넣고 있는 데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인플레이션 둔화 조짐 속에 금리 인하 사이클에 접어든 것이 주식시장에 뒷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루치르 샤르마 록펠러인터내셔널 회장은 최근 FT(파이낸셜타임스)에 “팬데믹을 거치며 정부와 중앙은행이 공급한 수조 달러 규모의 대규모 유동성이 주식과 금을 포함한 많은 자산의 가격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달러 약세도 미국 외 주요국 주가 상승을 이끌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과 연준 독립성 논란, 급증하는 미국 재정 적자에 대한 불안 등으로 올해 달러 가치가 6% 넘게 하락했는데, 달러 약세로 비(非)미국 기업들의 달러 환산 이익이 상대적으로 늘어나 주가 상승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