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이 기업의 자사주 매입 성격을 ‘자산 거래’가 아닌 ‘자본 거래’로 명확히 하는 내용의 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여당을 중심으로 국회에서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는 제3차 상법 개정이 논의되는 가운데 이번 세법 개정안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회계적 기반을 마련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코스피 5000 특별위원회’ 위원장 오기형 의원은 자사주 매입을 자본 거래로 명확히 하는 내용의 소득세법·법인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고 22일 밝혔다. 한국이 채택한 국제 회계 기준(K-IFRS)은 기업의 자사주 거래를 자본 거래로 보지만, 법인세법은 자사주 거래를 자산 거래로 보고 있어 회계 원칙과 세법 간 불일치가 지속돼 왔다. 오 의원은 “현행 세법은 매입한 자사주를 ‘자산’으로 보는 전제하에 과세 근거를 두고 있어 경영진이 자사주를 기업 자산처럼 인식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기업 경영진이 자사주를 자산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사주 매입을 기업의 성과를 주주에게 돌려주는 수단이 아니라 주가 안정, 경영권 방어 등 다른 목적에 이용한다는 뜻이다.
◇자사주 소각 논의 앞두고 EB 발행 급증
전문가들은 이번 개정안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위한 포석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변호사)은 “자사주 매입을 자본 거래로 명확히 규정하면, 자사주를 사는 순간 기업의 자본이 줄어드는 셈이 된다”며 “자본이 줄어든 만큼 주식도 사라져야 하므로 자사주는 결국 소각돼야 한다는 논리 구조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기업들의 자사주 기반 교환사채(EB) 발행은 급증하고 있다. 지난달 유가증권·코스닥 상장 종목의 자사주 기반 EB 발행 공시는 총 39건으로, 월간 기준 역대 최다치를 기록했다. 이달 들어서도 21일까지 8건이 추가됐다.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되면 자사주를 활용할 수 없게 되는 만큼, 그 전에 자사주를 EB로 전환하는 대안을 선택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EB는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현금 대신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조건이 붙은 채권이다. 이 채권에 투자한 사람이 현금 대신 주식으로 받기로 할 경우 기업 입장에선 사실상 자사주 매도와 같은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오 의원은 이날 한 포럼에서 “자사주 기반 EB 발행이 불법은 아니지만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 조항이 이미 발효됐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며 “주주들이 소액 주주권을 행사해 법원에 가게 되면 그 결정을 했던 이사들은 자신의 전 재산으로 책임을 질 것인지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7월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이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되면서 소액 주주들이 기업의 EB 발행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재계 “과도한 규제” vs. “주주 가치 제고 촉매”
대신증권에 따르면, 지난달 26일 기준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상장사가 보유한 자사주는 총 84조3380억원어치로 코스피 시가총액의 3.1%, 코스닥의 경우 9조1690억원으로 코스닥 시총의 2.1%에 달한다. 이경연 대신증권 연구원은 “자사주를 전량 소각할 경우 코스피 주당순이익(EPS)은 약 3.2%, 코스닥은 약 2.1% 개선되는 효과가 있다”면서 “한국 시장에서는 자사주 매입 단계에서 재무적 효과가 이미 완료되었음에도 소각 발표가 투자자에게 강력한 신호 효과를 주어 주가 상승을 유도하는 특성이 있는 점을 감안하면,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단순한 EPS 개선을 넘어 주주 가치 제고의 촉매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선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과도한 규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되면 기업의 자기 주식 취득 유인이 줄어 결국 주주 환원이 감소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필요할 때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기업이 자사주를 취득하는데, 취득 즉시 소각해야 한다면 매입할 이유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신현한 연세대 교수는 “소각에 의한 단발적 주가 상승에 매몰될 경우, 오히려 장기적으로 반복적인 자기 주식 취득을 통한 주가 부양 효과를 잃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