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기근, 전염병 창궐, 금융 위기 같은 상황도 아닌데 금이 폭등한다. 매우 불편한 랠리다.”(케이티 마틴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니스트)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달러 대체 자산’으로 몰리는 이런 현상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매우 우려스럽다.”(켄 그리핀 시타델 최고경영자)

세계 투자자들이 달러·엔 등 전통적 화폐를 버리고 금·비트코인 등 비(非)화폐 대체 자산으로 몰려들면서, 국제 금값과 비트코인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일본 등 주요국 주가도 사상 최고 수준이다. 통상 안전 자산인 금이 오를 때 위험 자산인 주식·가상자산 등은 떨어지는 ‘역(逆)의 상관관계’가 있지만, 지금은 이 공식마저 깨진 채 화폐가 아닌 모든 것이 동반 랠리(강세장)를 벌이는 중이다.

세계 금융 1번지인 미국 월가에서조차 이런 현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탈(脫)화폐 거래(debasement trade)’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한국금거래소의 골드바와 금거북이. /남강호 기자

◇’탈화폐 거래’, 어쩌다 대세가 됐나

미국 월가에서 ‘헤지펀드 제왕’으로 불리는 켄 그리핀 시타델 최고경영자(CEO)는 최근의 금, 비트코인 등 실물 자산 가격 폭등에 대해 “매우 우려스럽다(really concerning)”며 경고했다. 6일 뉴욕에서 열린 시타델 콘퍼런스에서 그는 “달러 가치는 올 상반기 50년 만에 최대 폭인 10% 하락한 반면, 금값은 올해 50% 넘게 올랐다”고 짚었다.

그가 보는 원인은 이렇다. 금은 시장 불확실성을 피하고 싶은 투자자들의 도피처인데, 투자자들이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 정지) 등 미국의 국가 위험과 여전히 높은 물가 상승세 등에 대응하기 위해 탈(脫)달러를 선택하면서 자산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주요 6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지표인 달러 인덱스는 작년 말 108.5였지만, 현재는 98.9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1973년 미국 달러의 상대 가치를 100으로 놓고 산출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달러 가치가 50여 년 전보다도 낮다.

최후의 안전 자산으로 꼽히던 달러 가치가 급격한 하락세에 접어든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을 앞두고 관세 인상을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올 초부터다. 동맹국까지 포함한 전면적인 관세 인상, 막대한 재정 적자를 가중시킬 감세안 추진, 연준에 대한 금리 인하 압박이 동시다발적으로 달러의 아성을 무너뜨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일본 엔화도 비슷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다카이치 사나에가 총리에 오르면 대규모 양적 완화, 재정 지출 확대 등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아베노믹스’를 계승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선거 이후 3거래일 만에 3.5% 급락했다.(엔화 환율은 상승.)

세계 투자자들은 화폐 가치 하락에 대한 위험을 피해 금 투자에 몰리는 중이다. 우선 세계 각국 중앙은행이 금 보유를 늘리면서 글로벌 외환보유액에서 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10년 전 10%에서 현재 21%로 두 배가 됐다. 그 바람에 외환보유액에서 달러 비율은 올해 2분기(4~6월) 56.32%로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95년 2분기 이후 30년 만에 가장 낮아졌다.

기관투자자들과 개인들은 상장지수펀드(ETF)를 통해 금 투자 행렬에 올라탔다. 시장 통계 업체 모닝스타 다이렉트에 따르면 지난달 금 연계 미국 ETF에 330억달러(약 47조원)가 유입됐다. 월간 자금 유입 규모로는 사상 최대다.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창업자이자 세계적인 투자자인 레이 달리오는 최근 “투자 포트폴리오 15%는 금에 분배하라”며 금 투자를 권하기도 했다.

그래픽=김현국

◇AI 광풍에 주식도 끝 모를 상승

AI(인공지능) 투자를 연료 삼아 주요국 증시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기술주 강세 속에 6일 뉴욕 증시의 S&P500과 나스닥 지수가 사상 최고로 마감했다. 7일엔 오러클의 영업 마진이 예상에 못 미친다는 소식에 주가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AI발 투자 열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그러나 ‘버블(거품)’ 우려의 목소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행사에서 “지금은 과잉 낙관의 시기이며, 이런 시기 뒤에는 언제나 조정이 온다”며 과거 닷컴 버블 후 많은 투자자가 돈을 잃었던 일이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금값 급등에도 경고가 나온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폴 시아나 애널리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금값이 과열 구간에 있어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탈화폐 거래(debasement trade)

달러·엔 등 전통적 화폐 가치 하락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이 화폐들을 버리고 금·은·비트코인 등 비(非)화폐 대체 자산으로 몰리는 최근의 현상을 가리키는 월가의 신조어다. JP모건이 처음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