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지갑만 쥐어짜네요.”
직장인들의 노후 자산 적립 창구인 연금저축 제도가 10년 넘게 제자리걸음을 하며 불만이 커지고 있다. 2013년 세제 개편 이후 제대로 손질되지 않은 탓에, 현실과 동떨어진 낡은 제도가 곳곳에서 논란을 키우고 있다. 이대로라면 은퇴 준비의 기본 틀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동엽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상무는 “예전에는 연금에 가입한다고 해도 예금·보험이 대세였지만, 지금은 연금 계좌에서 국내외 펀드에 투자하는 국민이 많아졌다”며 “은퇴 이후 연금이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불합리한 점이 있다면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5500만원 기준, 왜 고소득 잣대인가
“연금 계좌 세액공제율은 왜 5500만원을 기준으로 나뉘는 건가요?”(40대 회사원 이모씨)
연금 계좌는 총급여액 5500만원을 기준으로 해서 세액공제 세율이 16.5%와 13.2%로 나뉜다. 세액공제 한도인 900만원을 가득 채워 넣는다면 각각 148만5000원과 118만8000원을 연말정산에서 돌려받게 된다.
문제는 이 기준선이다. 직장인들은 “왜 하필 5500만원이 기준이냐”면서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이미 300인 이상 기업의 대졸 초임이 5000만원을 넘어선 상황인데, “5500만원을 넘으면 고소득층이라 낮은 공제율을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특히 경계선에서는 소득 역전 현상까지 나타난다. 예컨대 연봉 5499만원인 A씨와 5501만원인 B씨를 비교하면, 세전 기준으로는 B씨가 2만원을 더 번다. 하지만 연금 세액공제를 적용하면 A씨가 더 높은 공제율을 적용받아, 결과적으로 연말정산 이후 손에 쥐는 돈은 A씨가 더 많아지게 된다.
박민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과세 당국에 5500만원을 기준으로 세액공제율을 달리 적용하는 취지를 물었지만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연금 계좌 세액공제율을 16.5%로 일원화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연금 전문가들 역시 문제를 지적한다. 한 연금 전문가는 “5500만원은 2013년 정부가 중산층 상한선이라고 규정한 금액이지만, 당시에도 논란이 컸다”며 “10년 넘게 방치된 낡은 기준이 지금의 불합리한 결과를 낳고 있다”고 말했다.
✅중도 해지하면 나타나는 ‘세금 역차별’
연금저축 계좌를 중도 해지할 때 생기는 ‘세금 역차별’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연금 계좌는 55세 이전에 깨서 수령하면 지금까지 받았던 세액공제는 전액 환수되고, 여기에 기타소득세 16.5%가 일괄 부과된다. 소득이 5500만원 이하라면 불이익이 없지만, 초과자는 사정이 다르다. 평소엔 13.2%만 공제받았는데도 해지 시점에는 16.5% 세율이 매겨져, 결국 3.3%포인트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불합리가 발생한다. 이처럼 중도 해지 시 세금 부담이 과도하게 늘어나는 구조는 직장인들의 불신을 키우고, 연금 활용을 위축시키는 문제로 지적된다.
✅연금 계좌에 한국 주식 담으면 손해
올해 코스피는 40% 넘게 뛰며 세계 증시 최상위권 성적을 기록 중이다. 하지만 연금 포트폴리오에 한국 시장을 담으라는 전문가 조언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실제 투자 행태도 이를 뒷받침한다. 1일 삼성증권에 따르면, 수익률 상위 10% 연금 투자자의 보유 종목 가운데 6위까지는 모두 미국, 빅테크를 중심으로 한 해외 상품이었다. 한국 투자 상품은 상위 10개 중 단 2개(SOL 조선탑3플러스 ETF, PLUS 고배당주 ETF)에 그쳤다.
연금 투자자들이 해외 시장에 집중하는 이유는 단순히 수익률 때문만이 아니다. 세제 측면에서도 해외 투자 쪽이 유리하다.
국내 주식형 펀드는 본래 매매 차익에 비과세가 적용되지만, 연금 계좌로 투자하면 연금 수령 시점에 세금을 내야 한다. 이에 시장에서는 “연금 포트폴리오엔 한국을 넣지 마라” “연금에 국내 주식 담으면 (세금 내주는) 찐애국자”라는 말까지 나온다.
예를 들어 5000만원을 투자해 500만원의 매매 차익을 올렸다고 하자. 일반 계좌에서는 세금이 0원이지만, 연금 계좌에서는 수령 시점에 16만5000~27만5000원(운용 수익의 3.3~5.5%)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반대로 해외 주식형 펀드는 일반 계좌에서라면 같은 수익에 대해 77만원을 세금으로 내야 하지만, 연금 계좌를 활용하면 부담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
김경식 플레인바닐라투자자문 대표는 “국내 주식형 펀드를 연금 계좌에서 투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라며 “일반 계좌라면 애초에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을 내는 셈”이라고 했다.
김동엽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상무는 “연금 계좌는 늘어난 수익 전체가 전부 과세 대상으로 잡힌다”며 “국내 증시 활성화를 위해 ISA(종합자산관리계좌)처럼 국내 주식형 펀드의 매매 차익을 과세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