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난달 말, 국내 주식시장에서는 뜻밖의 움직임이 있었다. 굵직한 제조 기업들이 노란봉투법 때문에 타격을 받을 것이란 암울한 전망에 많은 이가 걱정하고 있을 때, ‘로봇주’들이 일제히 급등한 것이다. 이 법 때문에 산업 현장에서 근로자를 로봇으로 대체하려는 수요가 많아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산업용 로봇이나 휴머노이드 로봇 관련 기업으로 매수세가 몰렸다. 국내 자산운용사의 한 펀드매니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시각만 달리한다면 투자 아이디어는 늘 있기 마련”이라며 “로봇주 폭등이 바로 그런 사례”라고 말했다.
“투자 아이디어는 매일 당신 주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월스트리트의 전설로 꼽히는 유명 펀드매니저 피터 린치의 유명한 이 투자 격언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올해 한국 시장 투자자들 앞에 굵직한 투자 아이디어가 새로 출현했다. 새 정부 국정 운영 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ABCDEF... ‘혁신 경제’에만 54조원 푼다
출범 100일이 지난 이재명 정부는 주주 중심 거버넌스로 전환이 핵심인 1차·2차 상법 개정안을 처리했고,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는 3차 개정안도 준비 중이다. 특히 지난달 공개한 새 정부 국정 운영 청사진인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투자 지침서 역할을 할 전망이다. 1%대로 떨어진 성장률을 임기 내 3%대로 올리기 위해 정부는 향후 5년간 210조원 규모 돈을 쏟아붓기로 했다.
이 중 54조원이 ‘혁신 경제’를 이끌 핵심 예산이다. 이 정부 5년간 인공지능(AI) 3대 강국에 25조원, 산업 르네상스에 22조원, 에너지 대전환에 7조원을 투입한다. 박기훈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주요 국정 과제 범위는 사실상 전 산업을 망라하는데, 모든 산업에 동시다발적인 투자보다는 우선순위가 높은 분야가 선제적으로 지원받을 가능성이 크다”며 최선호주로 AI 반도체, 조선, 방산, K콘텐츠, 고배당 테마를 꼽았다. 이들이 국정 운영 과제 내 12대 중점 전략 과제에 포함되면서 동시에 세제 개편안에서도 강조됐기 때문이다.
당장 올해 예산안에서는 R&D 예산 확대가 눈에 띈다. 내년 R&D 예산은 올해(29조6000억원)보다 19.3% 늘어난 35조3000억원으로 책정됐다. 증가 폭이 역대 최대 수준이다. 늘어난 R&D 예산은 일명 ‘A·B·C·D·E·F’로 불리는 첨단 산업 분야별 핵심 기술 개발에 투입된다. AI(인공지능)·Bio(바이오)·Contents(콘텐츠)·Defense(방위산업)·Energy(에너지)·Factory(제조업)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이 중에선 방산 핵심 부품 국산화 및 국산 엔진 개발에 3조9000억원의 연구 개발비가 배정돼 가장 규모가 컸고, 에너지 분야도 실리콘카바이드(SiC) 전력 반도체나 태양광 유리, LNG 화물창 등 핵심 기술 개발·상용화에 2조6000억원이 투입돼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AI 분야는 물리적 실체가 있는 ‘피지컬 AI’ 관련 로봇 사업 등에 2조2000억원이 투자된다.
◇자사주 소각… “계속될 테마”
여권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포함한 3차 상법 개정안을 논의할 방침이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투자자들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현상) 해소를 위한 핵심 제도 중 하나로 꼽아온 것이다. 주식 수를 줄여 주당순이익(EPS)이 높아지면 주주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커진다는 계산이다.
눈치 빠른 투자자들은 정부 출범 전부터 자사주를 많이 보유한 종목들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했고, 기업들 역시 자사주 소각 행렬에 대거 나섰다. 금융 투자 업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자사주 소각 기업은 모두 206곳으로 집계됐다. 작년 전체 자사주 소각 기업 수(177곳)를 벌써 크게 웃돌았다. 자사주 소각액도 늘었다. 올해 자사주 소각액은 8월 말 기준 약 5619억원으로, 지난해(4809억원)을 이미 넘어섰다. 신현용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과거 자사주 매입뿐만 아니라 소각을 이행한 이력이 있는 기업이 추가적인 소각에 나설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사주 비중 상위 종목 중 지난해 이후 자사주를 매입·소각한 이력이 있으면서 올해 순이익 확대가 예상되는 기업으로 SK, 미래에셋증권, 금호석유화학, 엔씨소프트, 신세계, 유한양행, POSCO홀딩스 등을 꼽았다.
◇“정권마다 수혜주 뚜렷... 이번엔 ‘자본시장’이 최대 수혜”
한편 상법뿐만 아니라 자본시장법 개정 등을 통한 주주 가치 제고도 동시에 추진된다. 금융위원회는 합병이나 물적 분할 시 일반 주주를 보호하는 방안을 올해 안에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추진할 계획이다. 의무 공개 매수제 도입과 스튜어드십 코드 개선 등은 내년 상반기에 추진될 예정이다.
신한투자증권 리서치본부는 “국내 주식시장 수익률은 외국인 투자자 비중과 대외 경기에 민감한 기업 이익 등을 고려했을 때 정부 정책으로만 변수를 설정하긴 어렵지만, 과거 정부를 돌아보면 업종별 상대 수익률은 차별화가 됐다”고 분석했다. 대기업 수출 확대에 사활을 걸었던 이명박 정부 때 상대 수익률 상위는 자동차와 반도체, 화장품·의류 등이었고, ‘청조 경제’를 기치로 내건 박근혜 정부 때는 해외 관광객 유입에 따른 화장품과 의류, 헬스케어, 소프트웨어 등이 강세였다. 문재인 정부 때는 팬데믹과 초저금리를 겪으며 IT·소프트웨어 종목 등 성장주가 뚜렷한 강세를 보였다. 3년 남짓한 윤석열 정부 때는 방산 수출 지원과 밸류업 프로그램 관련 종목이 시장을 주도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정부가 건전성 우려로 확장에 한계가 있는 재정보다는 자본시장을 활성화해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필요한 자본을 조달할 계획이기 때문에, 주식시장 활성화를 뒷받침할 모든 정책을 강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