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강릉 전통시장에서 주전부리를 파는 50대 상인 A씨는 올여름 폭염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푹푹 찌는 날씨에 손님이 줄어든 걸 체감했기 때문이다. A씨는 “관광 온 손님들도 밖에다 주차해 놓고 시장까지 5분 걸어오는 것도 힘들어한다”며 “예전엔 비 오는 날 손님이 많이 줄어 걱정했다면 이제는 너무 덥거나 추운 날도 장사가 안 돼 걱정”이라고 했다.
A씨처럼 전통시장에서 날씨로 인해 줄어든 소득을 보상해주는 보험이 다음 달 출시된다. 특별한 피해를 증빙하지 않아도 기온이 일정 기준 위로 올라가거나, 비가 일정 기준 이상 내리면 미리 정해진 보험금을 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지수형 날씨보험’이 국내 출시되는 것은 처음이다.
◇하루 80㎜ 폭우 내리면 5만원
KB손해보험은 다음 달 중 단체보험 형태로 ‘전통시장 날씨 피해 보상보험’을 출시한다고 10일 밝혔다. 기존에도 상인들은 풍수해 보험 등을 통해 가게가 침수되는 등의 피해가 있으면 복구비를 보상받았다. 지수형 날씨보험은 실제 피해를 증명하지 않고도 폭염·폭우·한파로 손님이 오지 않아 줄어들었을 소득을 정액으로 보상해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상품은 일일 강수량이 10㎜ 이상이면 하루 최대 2만원, 20㎜ 이상이면 2만5000원, 30㎜ 이상이면 3만원 등을 주는 방식이다. 기준치가 높아질수록 정해진 보험금이 올라간다. 80㎜ 이상 비가 내리면 하루 5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파에 대해서도 하루 최저기온이 -8도 이하로 내려가면 하루 5000원, -10도 이하면 1만원, -12도 이하면 2만5000원, -13도 이하면 3만5000원을 보장한다. 기온이 따뜻한 제주도의 경우 -5도를 기준치로 설정해 하루 최대 5000원을 받을 수 있다. 폭염은 33도 이상이면 1만5000원을 보장한다.
가입자가 강수량·한파·폭염 기준점을 선택할 수 있다. 기준점이 낮을수록 보험료가 높아지는 구조다. 피해를 증빙하고 보험금 심사를 받는 절차가 줄면서 보험금 지급까지 걸리는 기간은 기존 2주 내외(풍수해보험 기준)에서 3~5일로 줄어들 전망이다.
KB손보는 전통시장 상인회 등을 통해 보험 가입을 받을 예정이다. 예를 들어 점포 500개가 있는 상인회가 하루 강수량 40㎜(보험금 3만5000원), 최고기온 35도(1만5000원), 최저기온 -11도(1만5000원) 조건으로 가입하면, 점포당 약 64만원 보험료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 같은 조건을 충족하는 일수를 따져봤더니 2021년은 66만원, 2022년은 77만원, 2023년은 59만원, 2024년은 51만5000원 보험금을 탈 수 있었다.
◇비 와서 공치면 ‘유급 휴가’
일정 조건에 닿으면 손해 사정 없이 보험금을 주는 지수형 보험은 기후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상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미 해외에서는 지수형 보험이 날씨보험 시장에서 주를 이루고 있지만, 국내에서 올 들어 본격적으로 발을 떼기 시작한 것이다. 지수형 보험은 복잡한 손해 사정 과정을 생략할 수 있어 훗날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자동으로 보험금이 지급되는 방식을 도입할 여지도 있는 미래형 보험으로 여겨진다.
지수형 보험은 이미 해외 보험 시장에서는 성장하고 있다. 시장 분석 업체 글로벌 마켓인사이트는 지수형 보험의 세계 시장 규모가 2023년 148억달러에서 오는 2032년 393억달러까지 연평균 11.5%씩 불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생업에 지장을 받는 일용직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도 향후 비슷한 형태의 지수형 날씨보험 상품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취약 계층에 일종의 ‘유급 휴가’를 보장하는 셈이다.
금융위원회와 보험업권은 지난달 300억원 규모의 상생 기금을 조성해 서민과 소상공인 대상 무료 보험을 운영하기로 했다. 폭염, 집중 호우 등으로 인해 영업이나 노동을 못해 발생하는 소상공인·일용직 근로자의 소득 상실 및 피해를 보전하는 기후보험도 상생 상품 중 하나로 언급됐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지수형 날씨보험은 기후 위기에 취약한 계층이 피해를 증명하기 전에 기본적인 소득을 보전해준다는 의미가 있다”며 “산업계에선 태양광 발전소 등에도 일조량이 일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보상을 해주는 등 지수형 보험이 쓰일 분야가 여전히 많다”고 했다.